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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잔 고르기

by Aphraates 2009. 11. 25.

술잔에 술이 부족하면 채우고, 넘치면 덜어서 수평을 맞춰 더도 덜도 아니게 똑같게 한다.

이른바 잔 고르기다.


그렇게 정리정돈 된 잔을 들고 원셧(One shot)을 외친다.

그리고 쭉 들이켜고 나서는 좋다며 박수를 세 번 친다.

때로는 이국적으로 감빠이(乾杯), 토스(Toast), 치어스(Cheers), 브라보(Bravo)를 하기도 한다.

또한 영국과 미국의 Good health(건강을 위하여)와 Cheer up(기분을 내라)와 Bottoms up(보텀스 업), 프랑스 아보트르 상테(A Votre Sante·당신의 건강을 위해), 이탈리아의 알라 살루테(Alla Salute), 스페인의 살루드 아모르 이페세스타스(Salud Amor Ypesestas 당신의 건강과 사랑과 돈을 위해서), 북유럽의 스콜(건강)을 복창하기도 한다.

잔 고르기는 주당들에게는 흥을 돋우는 멋진 것이지만 비주당들에게는 술을 억지로 먹이는 무지막지한 방법이자 비인간적인 수단이다.


며칠 전 거제도 산장에서는 잔 고르기 때문에 스테파노 아우님이 약 먹은 병아리처럼 졸며 힘을 쓰지 못했고, 내가 하루 종일 빌빌 거리다가 저녁 해장술을 먹고서야 원기를 회복했다.

간신히 회복된 상태에서 문상을 가서 지인들과 물 한 잔을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먼저 와 있던 건너편에 앉아 있는 직장 동료가 잔 고르기를 하는 것을 보니 꼭지가 얼추 돌아서 우스웠다.

옆방에서 주무시던 자매님들로부터 내일 일정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주무시라고 하는 원성을 들은 우리 잔 고르기 패들과 상가에서 “이 거 너무 과한데” 하면서 잔 고르기 하는 패들과 쌤쌤(Same Same)이면서도 웃는 것이 더 우스웠다.


여태까지 참 술 많이 마셨다.

그리고 지금도 뒤지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술이 몸에 일정한 긍정적인 역할은 할지 모르나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니 술 많이 마신다고 자랑한다면 미련 맞은 곰텡이다.


주당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잔 고르기 한두 번 하고 패그르르 하는 것을 루저 주당이라고 폄하하면 곤란하다.

두주불사(斗酒不辭)는 아니더라도 몇 차례 반복되는 잔 고르기 정도는 버터야 최소한의 주당이라고 객기를 부리는 것도 곤란하다.

권투선수가 칠전팔기(七顚八起)는 몰라도 사전오기(四顚五起)는 돼야지 카운터펀치 한방에 캔버스에 큰 대(大)자로 누워 일어날지 모른다면 체면이 말씀이 아니듯이 잔 고르기 한 방에 다운되고 그 이튿날 아무 것도 못 하거나 죽을 고생을 한다는 것은 주당계의 망신이라고 자만해도 곤란하다.

권투선수가 연속되는 잽과 카운터펀치를 이겨내고 승리해야 진정한 복서이듯이 주당도 잔 술 홀짝거리기와 잔 고르기를 이겨내야 진짜 주당이라고 의기양양해도 곤란하다.


빈속에 첫 잔을 들고 기분 좋게 브라보를 외치고 나서 “아, 좋다” 고 하는 주당들도 마지막 잔 고르기 하다가 그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 것이 주당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다.



http://blog.daum.net/kimjyyhm  http://kimjyykll.kll.co.kr

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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