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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다시 입사한다면

by Aphraates 2018. 11. 5.

다시 입사한다면 죽어도 사무직(事務職)으로는 안 한다.

 

퇴직 동기 13명 중 유일한 사무직 출신인 길() 형이 그제 금년도 하반기 부부동반 모임에서 한 말이다.

4G5G 시대를 지향하는 시점이지만 아직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정신이 강한 우리 현실에서 사()가 사였던 것을 후회막급으로 여기는 기이한 풍경인데 그럴 만도 한다.

기술직 출신들은 재취업한 곳에서 퇴사를 해도 귀신같이 알고 우리 회사에서는 이런저런 대우를 해 드릴 테니 오시라는 전화를 받지만 사무직 출신들은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면 이력서를 제출할 엄두도 못 내고 아예 포기하는 상태이다.

구인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제출하거나 연락을 하면 별 볼 일 없습네다. 다른 곳에 가 알아보시라우요라는 모욕적인 소리를 점잖게 들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직위와 직무와 급여를 따지는 것을 떠나 기술직 출신들은 갈 곳이 넘치고, 사무직들은 갈 곳이 안 보이는 것이다.

부익부빈익빈으로 평할 문제는 아니나 불평등한 것만은 사실이다.

 

현직에 있을 때 기술직과 사무직간에 갈등도 꽤 있었다.

 

기술직들은 기술 회사에서 펜대 잡은 사무쟁이들이 실권을 쥐고 이럭저럭한다며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나중에는 기술직들도 많이 등용이 됐지만 고위직과 요직은 인원수에서 많이 뒤지는 사무직 간부들이 주로 차지하여 이왈저왈하였다.

그렇다고 사무직 분야의 인사들이 주로 사장으로 선임돼 오는 판에 불만을 크게 나타낼 수는 없었고 뭘 모르는 사람들이 좌지우지한다며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었다.

 

사무직들은 그 반대였다.

기술쟁이들 뒤치닥꺼리만 해준다는 불만이 높았다.

손에 쥐어 준 것밖에 모르는 기술자들한테 뭘 맡겼다가는 되는 일이 없어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사무직들이 전담하다시피 한 지사장이나 지점장도 기술직으로 보하는 개편이 이루어졌지만 누가 봐도 기술직들만이 할 수 있다는 발전소장 직위 같은 것도 경영자 차원에서 사무직들이 가는 순환제도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지금은 뒤죽박죽인 거 같다.

때로는 전공이 뭐 중요하냐며 기술과 사무의 경계선을 쉽게 넘나들기도 하고, 전문화 된 세상에 그렇게 두루뭉술했다가는 살아남기 힘들다면서 확실한 전공을 살려야 한다고도 한다.

취직하여 먹고 사는데 는 기술직이 유리한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사무직이 우세라면서 그 쪽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이기도 하여 어느 쪽이 유리하다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전기 분야 출신 OB들을 위주로 퇴직 후를 살펴볼 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무직은 20점이라면 기술직은 80점 정도로 승패가 가려진다고 볼 수 있다.

35년의 기술 경험은 요긴하게 재활용되지만 40년의 사무 경험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재활용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지는 것이다.

 

인문계열로 갔어야 할 미당 선생은 기술계열로 입문하여 참 어려웠다.

직장인이라는 사명감과 가장이라는 의무감으로 임하여 남 못지않은 직장생활을 하였지만 적성에 안 맞는 일에 매진하는데 는 고초가 컸다.

길 형과는 반대로 재직 시를 생각하면 재입사를 한다면 기술직으로는 절대로 안 가겠지만 현재를 생각하면 기술직이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유불리를 떠나 닥치면 다 하게 돼 있다.

넥타이를 매고 책상에만 앉아 있던 사무직 출신 간부 후배님이 전화를 하여 형님, 체면 가릴 때가 아닙니다. 저는 조그마한 트럭 하나 사 갖고 서울 오가는 운송업을 하고 있습니다. 짐을 싣고 올라갈 때 OO만원이고, 내려올 때 재수 좋으면 O만월 받아요. 이렇게 삽니다라며 웃을 때 잘 했어요. 그게 뭐 어때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며 재밌게 해요라는 말로 위로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발가벗겨 시베리아에 내팽개쳐도 살아남을 수 있고, 솜바지 저고리를 입혀 사하라 사막에 앉혀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것은 다 옛날이야기이지만 그 기개는 조금 남아 있는지라 그럭저럭 돌아가는 머리와 움직이는 손발을 쉬게 할 것은 아닌 것 같다.

 

남의 영역을 침범할 것은 아니다.

찾아보면 뭔가는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입사한다면 어쩌고저쩌고 가린다는 생각을 버리고 일단은 어디든 입사를 하고 볼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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