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 植
미당 본가와 예산 형님댁을 다녀오면서 친구 식(植) 즉, 영식과 효식 친구와 통화를 했다.
우연한 일치의 두 식이었다.
한 친구로부터는 전화를 받았고, 한 친구한테는 전화를 했다.
한적한 마곡사(麻谷寺) 계곡 길을 달릴 때다.
서울 친구 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자 벌터 동네 아래 윗집의 발가숭이 친구다.
같은 친구 근(根) 친구와 함께 삼총사라고까지 불렸는데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소원한지 좀 됐다.
친구들끼리 SNS 하는 것이 시끄럽다면서 뛰쳐나가서는 깜깜무소식이어서 안타까운 데 그러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적극적으로 말리거나 돌아오라고 부를 형편도 아니어서 그저 그런 관계가 지속하고 있다.
어렸을 적부터 좋은 인상인 길이어서 종종 오가는 마곡사 길을 넘는 데는 조(趙) 가수의 노래 “창밖의 여자”가 들리는 듯했다.
1인 3역 이상을 하면서 건강하게 억척스럽게 살다가 몹쓸 병에 걸려 갑작스레 영면한 정(鄭) 작가가 창문을 열라고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참 좋고 친밀한 작가였는데 뭣 하나 제대로 해 주지도 못했다.
그렇게 아프면서도 늘 명랑하게 웃으면서 문단 활동을 하여 위중하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간접적으로 부음을 들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할 것이지 왜 미련 맞게 참고 버텼는지 참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이라고 원망하면서 영원한 안식을 기도하는 다정한 후배 작가였다.
일련의 고통이 끝났어도 계속되는 아픔인 것을 그리고, 인간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인 것을 그저 당신께 매달려 자비를 청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쓸쓸한 마곡사 길을 더욱더 외롭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식 친구의 소식도 받아들이긴 하나 맘을 무겁게 하는 소식이었다.
청춘부터 운영해오던 서울교대 앞의 서점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했다.
전에도 이제는 버티기가 버겁다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어려운 줄은 몰랐는데 코로나의 직격탄은 피해 가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고생 많이 헸으니 이제 좀 쉰다고 생각하면서 맘을 편히 가지라 했다.
아직 일손을 놓기는 그런데 앞으로 계획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반(半) 귀향하는 식으로 하여 시골 고향의 어머니와 함께하면서 차차 생각해보겠다고 하는데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친구로서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나는 귀향했다가 지금 마곡사 길을 통하여 대전에 가는 길이고, 내일은 다시 삼천포로 내려갈 예정이라 했다.
아울러 남들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일을 좀 더 해야 할 처지라고 하였더니 친구는 능력이 출중하여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하는데 좀 미안했다.
마곡사 길을 지나 금강(錦江)을 끼고 무령왕릉과 공산성(公山城) 길을 달리는데 금성동의 무지개 아파트가 눈에 더 들어왔다.
거기에서 살다가 은퇴 후에는 고향이자 처가 동네인 논산에서 사는 또 다른 친구 식한테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당신의 자비를 청하면서 몹쓸 중병과 투병하고 있다.
가끔 가보긴 하나 자주 가진 못한다.
가끔 전화하여 컨디션이 어쩌냐고 물으면서 환자가 다 그런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먹고 움직이면서 몸을 만들어 가자고 위로 겸 독려를 하는데 쉽게 회복되기 어려울 친구의 고통을 생각하면 여간 맘이 아픈 것이 아니다.
며칠 후에는 다시 대전 성모병원에 입원하기로 예약해놨다고 했다.
내가 올라오면 가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며 이겨내자고 하였더니 그렇겠다면서 웃었다.
일을 좀 더 해야 하는데 일손을 놔야 하는 서울 식과 일은 못 할지라도 몸이나 좀 성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논산의 식과 전화를 받고 하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동학사 입구에서 공주 칼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두 친구를 생각하니 국물까지 다 마시면서 흡족해하는 우리 부부 자신이 고마웠다.
그리고 두 친구한테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것이니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고 이겨내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평화방송을 통하여 대전 목동 수도원 수사님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빛과 환희와 고통과 영광의 신비를 우리 모두에게 비춰주시라고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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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