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도림천

Aphraates 2022. 6. 20. 06:54

갑신정변.

역사 시간에 숱하게 들었던 근대 한국사의 한 장이다.

조선말 외국 열강들이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리던 혼란기에 김옥균을 주축으로 한 개화파가 수구파 축출을 시도하였으나 삼일천하로 끝난 개혁운동이었다.

그 때 그게 성공했더라면 오늘 우리는 어땠을까.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도 한다.

하지만 역사는 가정이 아니라 실제다.

오늘의 잣대로 옛날을 평가하는 것은 안 맞는다.

클레오파트라 코가 좀 낮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봐야 소용없다.

후세들이 과거에 우리가 이랬으면 어땠을까 할 것이 아니라 과거를 조명하고 현실을 반영하여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페일언하고.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선생을 재조명해본 것은 최근 일이다.

세도가 안동 김씨의 후예로서 충청도 공주 정안 태생이었다는 것을 안 것이 시발이었다.

문단의 마곡사 모임이 있었다.

시낭송회를 마치고 일행과 고 정()작가의 댁을 들리면서부터였다.

대전으로 오기 위하여 새로 개통한 정안-세종 국도로 진입하는데 차령 고개 아래 동네에 김옥균 생가 000미터라는 팻말이 서 있었다.

신기했다.

어디 먼 다른 지역 태생쯤으로 생각했었는데 바로 코앞 동네 출신이라니 몰라본 것이 죄송하기도 했다.

갑신정변이 1884년도 일이다.

2022-1884=138년으로 백 년이 좀 넘었는데 까마득한 역사 이야기인 거 같은 느낌이다.

고균 선생도 그렇다.

1851년생이니 1884-1851=33살이었다.

서른 갓 넘은 젊은 나이에 수염을 기르고 전통 한복 차림이었다.

그런 사진을 봐서 그런지 현대와는 아주 동떨어진 세대 같았지만 동 세대와 이어진 근대사 인물이다.

 

역시는 되풀이되고 진행 중이다.

그 이야기하려다가 갑신정변을 소환했고, 김옥균 선생을 모셨다.

뜬금없는 뚱딴지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도림천의 진풍경 '단체사교춤'중국계 문화생활 vs 볼썽사납다> 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려서 들여다본 것이다.

도림천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우리 고향 뒷동산 칠갑산 아래 첫마을 동네인 도림 이야기인 줄 알았다.

난개발과 무차별적인 이용으로 신음하는 칠갑산이 걱정돼서이기도 했다

우리도 초등학교 동창회 등을 통해 가끔 찾아가서 먹고 마시며 노는 곳이긴 하지만 외지인들에 점령당하고 상처받는 칠갑산 고랑을 걱정하는 뉴스구나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1990년대 초다.

중국이 막 개방되고 나서다.

상해를 거쳐 고도 시안(서안/西安/옛날의 장안)으로 고전압(高電壓) 연구 교류 차원 차 해외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많아 할 얘기도 많지만 그거는 생략한다.

죽의 장막이 개방된 지 30여 년이 넘고 교류가 활발하여 웬만큼 밝혀진 것이니 다음에 기회 될 때 다시 하기로 한다.

 

오늘은 기사로 실린 중국 단체 사교 춤에 대해 좀 말하고 싶다.

중국 출장 시에 특이한 풍경 하나가 그것이었다.

한적한 공간이나 광장에 가면 남녀노소 가릴 거 없이 모여서 춤인지 체조인지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 일찍 또는 출퇴근 시간 전후나 점심시간에 많이 보였다.

호텔에서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내려다보거나 연구소의 외빈 차량을 이용하여 이동하다 보면 특별한 격식 없이 자유자재로 손발을 놀리며 즐기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통제되고 폐쇄적인 공산주의에서 부문적으로 개방이 된 지 몇 년이 됐다고 저렇게 자유분방할 수 있을까 하고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생활의 하나라는 설명을 우리의 파트너인 휑 박사님으로부터 듣고는 고개가 끄떡여졌다.

기이한 소림사 무예를 하는 것도 아니고, 웅장한 창극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5·16 이후 재건 체조하듯이 하는 가벼운 체조였다.

 

그 중국 문화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서서히 세 확장을 하는 것 같다.

30여 년 전에 실크로드(Silk Road, 비단길) 시점인 시안에서 보던 단체 사교춤 모습을 영등포 공장지대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신도림동에서 보게 되다니 화젯거리가 충분히 된다.

동북공정이라는 트라우마도 있고, 우리 한반도를 옥죄는 열강의 하나인 대륙이라는 경계심도 있고, 일본보다는 덜 하지만 같은 동북아권이면서도 이질감과 거부감이 크다는 우려도 있다.

상황이 그럴진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소중하게 고집해야 할지 남의 것이라도 좋은 것은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해라는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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