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시오
우리 본가가 이사를 한 것은 딱 한 번이다.
백마강 가는 길에 있는 청양군 청남면 한터에서 칠갑산 가는 같은 군 장평면(적곡면) 벌터로 온 것이다.
두 곳은 어른 발걸음으로 1시간 반 쯤 걸리는 7km쯤 떨어졌다.
청양군 칠갑산 산너머 남측 4개 면(장평, 청남, 목면, 정산)내의 다른 면이었다.
그때 나이는 몇 살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기억나는 것은 벌터로 이사와 이사 떡을 돌리고 얼마 안 돼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었다.
세월을 역산해보면 1966년도 2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주로 유학을 하였으니 1960년도에 초등학교 입학했다는 계산이다.
1961년 5월 16일에 5·16 쿠데타가 일어난 정치 격변기에 초등학교를 다닌 것인데 “재건”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허리 굽혀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이 오시어 지게 짐을 지고 한터에서 이사할 때 팥죽을 먹은 생각도 난다.
그 때는 그게 무슨 팥죽이었고, 누가 써 준 것인지 몰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랫집이 이사한다고 이웃집 누군가네에서 팥죽을 쒀준 것 같았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오랜 풍습이었다.
벌터에서도 이사 떡이었다.
동네 낯선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오시어 이사를 도와주시고 말씀들을 나누셨다.
갓난 엄니와 따라온 친척들께서는 팥고물이 들어간 시루떡을 해서 동네에 돌리고, 동네 어른들은 수시로 오시어 집안 곳곳을 돌며 정리해주시며 밥을 함께 드시었다.
이사 팥죽과 이사 떡은 생각만 해도 정겹다.
그러나 이제 보기 어렵다.
포장 이사가 대부분인 요즈음 이사 집에 얼쩡거려봤자 도움이 될 게 없다.
가볼 일도 없고, 팥죽과 떡을 구경할 수도 없다.
이사 집 잔치도 사라지고 있다.
이사 간 집에서는 같은 동네의 일원이 되었으니 함께 잘 살자는 취지와 신고하는 의미에서 잔치를 벌였다.
잔치 집에 가는 사람들은 부자 되라고 성냥, 초, 화장지, 세재 비누 꾸러미를 들고 가서 환영했었다.
다 흘러간 유행가처럼 됐다.
있던 것이 없어지면 서운하다.
뭐든지 싹둑싹둑 잘라내 버리면 삭막하다.
그리움과 추억을 더듬으면서도 “그때는 그랬었지. 뭐니 뭐니 해도 그때가 좋았어” 하고 탄식하면 그래도 할 것은 해야 하는데 하는 미련과 함께 인생이 서글퍼진다.
이제 이별과 환영에 연연하지말고 차가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어제는 좋았다.
꺼져가는 등잔불이 살아나듯이 이사 짜장면이 있어서였다.
현장 철수 중이다.
각자 자기 짐들을 챙기면서 떠날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그건 싫었으나 이사 팥죽과 이사 떡을 떠올리게 하는 이사 짜장면의 점심은 훈훈했다.
다른 직원분들과 함께 이사 준비를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던 현대 이(李) 소장님께서 오늘 이사하는 날 점심은 이사 짜장면이라고 제안하시어 도통동의 중국집으로 갔다.
메뉴를 짜장면으로 통일시킨 것은 아니나 다른 메뉴인 탕수육이나 짬뽕이나 밥류도 내내 이사 짜장면 바운다리로서 푸짐한 한 상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약 없는 재회를 약속하는 아쉬운 작별의 짜장면이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좋은 것만 기억하자는 약속은 언젠가부터 무의식적으로 해왔으니 별다른 감이 없었는데 오늘에사 모든 것이 녹아내리면서 덧없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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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공학석사/전기안전기술사/PMP, 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국내여행안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