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음악은 기록입니다. '이등병의 편지'나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삶의 노래죠. 시, 소설, 역사 등 많은 책을 읽었죠. 시대정신을 담은 음악을 만들려고요. '홍범도의 묘비', '무소유의 노래' 등 서사가 있는 노래는 그렇게 탄생한 거죠. 케이팝이 뜨는데, 한국 문화를 더 알릴 노력이 필요해요. 아름다운 한글 손 글씨를 활용해서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 했잖아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스물아홉 번째 주인공 김현성(62) 작곡가 겸 가수·시인의 말이다. 26일 여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대중가요를 작곡하고 노래하는 자기 일을 기록이라고 했다. 개인의 삶, 사회·역사적 서사가 담긴 음악을 하는 건 그 때문.
그는 '이등병의 편지',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작곡했다. 노랫말이 아름다워 다들 서정에 관심을 두지만, 청년 김현성에게는 서사가 더 중요한 작품이다. '이등병의 편지'가 분단된 땅 청년의 고민을 담았다면,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제가 음악할 때만 해도 폭압 정치로 사회적 아픔을 노래하기 힘들었어요. 독재정권 억압이 컸거든요. '이등병의 편지'는 1990년대 금지곡으로 선정됐어요. '슬픈 내용이 염세적'이라더군요. 우스꽝스런 '고무줄 잣대'였죠. 그 덕(?)에 얼토당토않게 반전 가요가 됐지만요. 2008년엔 '아름다운 노랫말 상'을 주더라고요. 황당했죠."
▲‘이등병의 노래’ 작곡가 김현성씨. ⓒ 최방식관련사진보기
사라지는 아름다움,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는 음악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했다. 멜로디에 집착하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랫말이 풍성하면, 음악성도 더 돋보인다고 본 것. 음악인들이 끊임없이 책을 읽어야 하는 까닭이었다. 역사 인식과 사회의식을 키우고 시대가 요구하는 서사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김민기 한돌 정태춘 같은 선배들을 보며 노래했어요. 밥 딜런이나 존 레넌 같은 해외 뮤지션들도 좋아했고요. 유흥 음악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동시대인의 아픔을 공유·치유하는 노래를 하려고 했죠. 민중가요에만 집착하는 건 경계했어요. 대중성이 떨어지기에."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반전 평화 노래다. 밥은 '저항가요'가 아니라 했다.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어는 시대공감 메시지라는 것. 장자는 '우언(寓言)'이라 했다. 도(道)를 말로 하지 않고 우화로 깨우치는 까닭.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지북유 편)는 말은 그렇게 나왔다.
그는 청년 시절 시노래 운동에 나섰다. '나팔꽃'(김원중, 김용택, 안도현 등 참여) 모임도 그 단체 중 하나. 시대정신을 담는 노랫말을 사용하려는 노력이었다. 사랑·이별 소재를 벗으려는 몸부림. '강물 속에 또 강물이 흐르고'(정태춘) 노랫말이 음악의 맛과 울림이 더 키우듯.
그는 음악을 고2 때 시작했다. 매일 몇 시간씩 기타를 배우고 치며 음악에 빠져들었다. 교회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대학에 가서는 사회성 짙은 선배들과 어울렸다. 노래패 '단기 4312년 길에서 만난 소리패'(80년 '청량리 블루스' 발표, '유리창엔 비' 부른 그룹 '햇빛촌'으로 분화, 장필순 등 참여) 활동하며 가톨릭여학생회관(전진상 교육관) 공연 등을 했다.
"대학 졸업하고 한돌 선배를 찾아간 적 있어요. 대뜸 '이등병의 편지' 쓴 애냐고 묻더라고요. 제 다른 노래엔 별 관심을 안 보이면서요. '그거 말고도 곡이 많은데' 안 묻더라고요. 그 기획사에서 제 첫 음반 '어린 날로부터 온 편지'를 냈어요."
그는 대학에서 나름 잘나가는 가수 지망생이었다. 데뷔하려고 곽재혁(후라이보이 곽규석씨 아들)과 듀엣을 준비했다. 그런데 부친의 노래 금지령이 떨어졌고, 그가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르며 물거품이 됐다. 설상가상 징집명령까지 떨어졌다.
▲‘홍범도 콘서트’. 지난 21일 저녁 7시 노무현시민센터에서 개최됐다. ⓒ 김현성관련사진보기
"아는 자 말 않고, 말하는 자 몰라"
그때 나온 게 '이등병의 편지'다. 친구 입영을 배웅하며 느꼈던 걸 노래로 작곡했는데, 자신의 입대 이틀 전 녹음을 하고 논산훈련소로 입소한 것. 1년 만에 부대로 그 음반(LP)이 배달돼 왔고, 그 뒤 부대 방송 음악으로 흘러나오곤 했다.
"중대장이 불러, 대뜸 '너 가수냐' 묻더라고요. '아니요, 나도 이 음반 처음 본다'고 했더니, '주말에 틀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몇 달간 듣다 어느 날 안 들려 담당 병사에게 물었더니, '이등병(신병)들이 이 노래 듣고 운다고, 중대장이 방송 금지했다'더군요."
'이등병의 편지'는 <한겨레>가 기획한 '겨레의 노래'(김민기 총감독) 공연곡으로 선정됐다. 1990년 전인권이 녹음했다. 하지만 그가 공연에 불참, 김광석이 대신 부르게 됐다. 음반도 발표했다. 유명세를 타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OST(시나리오 감독이 지정)로 선정됐다.
영화 <헤어질 결심>(탕웨이 주연, 박찬욱 감독) OST를 알 것이다. 100여 년 전 쓰인 구스타프 말러의 아름다운 선율(아다지에토, 교향곡 5번 4악장) 때문이다. 그는 연인 '알마'(뒤에 부인)에게 바친 사랑고백 교향곡 6번 1악장(알마의 테마)이 혹평받자, 니체 말로 둘러댄 일화가 유명하다. '난 내 시대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고 했던 것. 말러는 먼 훗날 자신의 시대를 맞이했다. 훈련소로 가는 나약한 이등병, 시대의 노래로 등극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노래뿐 아니라 음악극도 여럿 공연했다. '1923년 간토대지진'(다큐 주제가 작곡, 2023년), '별을 스치는 바람'(윤동주, 2023년), '그 사내 이중섭'(2024년), '오세암'(정채봉 동화, 2009년), '그 여자네 집'(김용택 시, 2008년), '무소유의 노래'(법정, 2012년), '불꽃'(전태일 평전, 2023년), '홍범도 콘서트'(2025년 출연 노래) 등. 저서로는 시집 3권(1집 <그대 어서 와 그리움 나누고 싶다>(1997년)과 2집 <가을 우체국 앞에서>(2001년) 등) 노랫말 창작 이야기를 담은 <오선지 위를 걷는 시인들>(2003년)이 있다.
이 밖에도 그는 레코드사 예당(최성수 소찬휘 녹색지대 등 음반 제작) 제작팀장, 가톨릭 음반사 '성바오로 딸' 음반작업(수녀들 음악 훈련 뒤 발매), 조계사 연등축제기획위 노래 제작(2006년부터 16년간), 월간 샘터 '시노래 이야기' 연재(1년여), 윤도현·백자·손현숙 등의 노래 훈련이나 무대 출연지원(그는 '곁에 두다'라 표현) 등의 활동을 해왔다.
"가난했지요. '이등병의 편지'를 내고 군 복무 중인데, 같이 활동했던 장필순이 잘나간다는 소식을 접하니, 서글퍼지더라고요. 155밀리 포신을 닦고 있는 내 처지가. 30대 중반까지 변변치 못해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돈 없는 건 별문제 아니었어요. 차비만 있으면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가 여주에 이주한 건 2002년. 제주로 가려다 가족 반대로 포기했다. 처가가 여주(흥천면 효지리)에 있어 내려왔다. 새집을 지어 처가(낡은)와 합쳤다. 마당 있고 한적한 삶이 좋았다. 매일 출근하는 일이 아니어서 수월했다. 그는 부인과 아들 둘을 뒀다. 큰 애는 아버지를 따라 음악을 하고 있고, 둘째는 배드민턴 선수를 하다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다.
▲‘그 사내 이중섭’ 음악극 공연. 2024년 10월 박재동 갤러리. ⓒ 김현성관련사진보기
나약한 이등병, 그 '시대의 노래'
"장인과 함께 사니 불편한 게 좀 있어요. 묘목을 심으면 사라지는 거예요. 장인이 다른 데 옮겨심는 거예요. 저는 꽃 피는 나무를 심고 싶은데, 장인은 열매 달리는 걸 원했어요. 항아리 정원 장식도 하고 싶은데, 왜 그걸 돈 주고 사냐며 반대하기도 하고."
여주 지역사회 활동으론 이항진씨가 시장할 때 '시가'(시 노래)를 작곡했다. 전 시가가 일제 부역자가 만든 것이라 바꾸게 된 것.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여강 등 지역 자연환경을 소재로 한 작품을 해보고 싶다. 고향 파주에서는 시가 2020년 국비 21억 원을 들여 '이등병 마을, 편지길 조성사업'을 추진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지지부진한 상태.
그는 요즘 뮤지컬(가제 이등병의 편지)을 준비하고 있다. 80년대 상황을 담은(스냅사진처럼 보여주는) 작품. 한데, 필요한 자금 4억 원이 준비되지 않아 못 올리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역사 인물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음악극·뮤지컬을 더 해보려고 한다. 동화나 소설, 그리고 시집도 준비하고 있다.
https://youtu.be/E_oba9TZSZg?si=SGyY5vvo-tSDUy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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