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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김빠진 맥주

by Aphraates 2015. 2. 28.

맥주를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해서 탁각이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먹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실 기회가 있으면 다른 술보다는 맥주를 찾는다는 얘기다.

격식이나 별다른 안주도 필요 없이 학고방의 낡은 탁자에 앉아 멸치를 안주 삼아 병맥주를 마시는 모습도 좋고, 마을 앞 커다란 정자나무 아래서 땅콩을 안주 삼아 캔 맥주를 즐기는 모습도 은은하고, 좁고 왁지껄한 코딱지만 한 집에서 생맥주잔을 부딪히는 모습도 참 멋지다.

 

맥주는 국산이 입맛에 맞는다.

OB와 Crown으로 대표되던 국산 맥주도 크게 달라졌다.

소비의 다양화와 기업의 M&A에 따라 이상한 이름들로 바뀌었는가 하면 로열티를 지불하는 외국 브랜드 맥주 국산화 출시에 이어 복일, 네덜란드, 일본 등 외국에서 직접 생산한 맥주가 저렴한 가격으로 막 들어오고 있다.

국산 맥주는 고급주이고 외국 맥주는 귀족 주라고 하던 시대는 옛날이어서 어디를 가나 흔해 빠진 것이 수입된 외국 유명 브랜드 맥주다.

우리의 국력과 부가 그만큼 커졌고, 우리들 입맛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OO X은 초콜릿이야 할 정도로 궁핍했던 해방 후의 실정과는 딴판이다.

그런 것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영화 국제시장에서 나오는 것처럼 파독 광부와 간호원, 구로공단, 월남파병, 중동근로자 등등으로 대변되는 우리 어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또한, 그에 일조한 측면이 다분한 미당 선생같은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거늘 이제 와서는 뒷방으로 밀려나 찬밥신세를 면치 못 하고 있으니......, 이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이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그 기조를 뭐라 탓할 수는 없지만 인생무상(人生無常)의 회한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맥주 얘기를 하다 보니 몇 잔 들어간 것처럼 울적해졌다.

주당들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청탁불문하고 두루뭉술하게 술을 마시는 것 같아도 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다.

어떻게 보면 걸걸하고 호탕한 술꾼 같은 사람이 술과 안주를 찾는 데는 여가 까닥스런 것이 아니어서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처럼 좀 비싼 집에 갔을 때 비싼 술을 억지로 몇 잔 마시다가는 양에 안 차 종업원한테 슬쩍 소맥 폭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거나, 모모처럼 안주라고는 소금이나 김치 조가리 정도면 훌륭하다거나, 누구처럼 대전 술이나 서울 술이나 다 그게 그건데 대전 술을 가져오면 반납하고 꼭 서울 술만 고집한다거나, 어떤 사람처럼 담근 술이 좋다면서 집안 가득히 술을 담가 진열해 놓는다거나, 그 사람처럼 진짜 술꾼들은 어울리는 재미가 쏠쏠하여 집에서든 밥상머리에서든 술은 안 마시는 것이 보통이거늘 혼자 고독을 씹어가면서 술을 마신다거나, 고무신 신고 맥주 마시던 땅 부자 말죽거리 원주민들은 떵떵거리는 사장보다는 수구레에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거나 하는 식이다.

 

머리도 식힐 겸 해서 베란다를 정리하다보니 플라스틱으로 된 커다란 맥주병이 하나 나왔다.

1/4 정도의 맥주가 남아 있었다.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이 멀쩡한 집에서 혹시 누가 실례를 한 것은 아닐 거 같아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니 맥주였다.

그런데 이미 김이 다 빠진 듯 했다.

운치 없이 양으로 승부하는 무지막지한 술병 스타일은 싫어하기 때문에 잘 이용을 안 하는데 아마도 며칠 전 아우님 내외들과의 설 명절 하례를 할 때 남은 것 같았다.

 

쏟아버릴까 하다가 남은 소주와 맥주를 모아뒀다가 기름기 제거하는데 쓰던 것이 생각나 데보라를 불러 가져가라고 했다.

맥주 김은 완전히 빠진 것 같은데 괜찮은지 모르겠다고 하였더니 술기운이 남아있는 소주와는 달리 맥주는 병뚜껑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둔다해도 술기운이 거의 다 없어지는 것 같지만 함께 넣어놨다가 쓰면 잘 닦인다고 했다.

 

피익......,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밥통 김빠지는 소리다.

밥통에 아무런 고장이 없어 밥이 잘 됐으니 어여 퍼다 먹으라는 좋은 신호일 수도 있고 밥통이 고장 나 밥이 잘 되기는 이미 글렀으니 먹든지 버리든지 맘대로 하라는 볼멘소리일 수도 있다.

밥통은 물건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밥통을 다루는 사람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

 

너부러진 빈 맥주병을 건네주고 나니 김빠진 맥주가 다시 떠올랐다.

맥주는 시간과 온도에 맞춰 바로 마셔야 제 맛이 난다.

어느 정도만 그대로 둔다거나 온도를 안 맞추면 김빠진 맥주가 되어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지릿한 맥주가 되고 만다.

타이밍의 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타이밍을 놓치면 잘 해 보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김빠진 맥주처럼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낭군과 아이들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 하여 알뜰살뜰하게 기똥찬 메뉴를 개발하여 푸짐하게 만들어 내 놨더니 젓가락으로 지금거리면서 이게 맛있는거냐며 쳐다보고는 맛있으면 엄마나 많아 먹으라고 한다면 김새는 일이다.

좌측을 불러들이면 우측에서 반발하고, 우측을 불러들이면 좌측에서 비토를 놓고, 중간을 불러들이면 색깔이 애매모호한 사꾸라라며 무시하여 잘해봐야 본전인 인사를 고심에 고심을 하여 단행하였건만 그게 한계라며 시큰둥한다면 역시 김새는 일이다.

 

올 해도 벌써 두 달이 다 끝나가고 있다.

너나 할 거 없이 정치개혁이니, 민생경제니, 복지향상이니 하면서 소리는 요란하지만 소문난 잔치 먹잘 것 없다는 식으로 뭐가 돼 가는 것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이렇게 어려워 본 적은 없다는 사람들이 많다.

곳곳이 지뢰밭이라는 걱정의 소리도 수그러들질 않는다.

위태위테하더니 급기야는 여기저기서 총질까지 벌어져 어수선하다.

 

불미스런 일로 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평안을 빌고, 그 가족들에게 대해서도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리면서 정말로 이래서는 안 된다고 탄식도 해 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생애착(生愛着)의 속담이나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는 창세기의 카인의 후예와 “살인해서는 안 된다” 라는 생명존중(生命尊重)의 출애급기 십계명 성경 말씀이 아니더라도 사랑하지는 못 할망정 자기나 남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아니 될 일이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일들을 하고 사는 세상인데 어찌 김새는 일이나 김빠지는 일이 없겠는 가만은 날이 갈수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왜 이다지도 김새고 김빠지는 사람들과 일들이 늘어나는 것인지 이러다가 그런 것이 고착화되는 것은 아닌지 다 함께 고민하고 자숙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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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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