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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잡기장통

by Aphraates 2015. 2. 26.

글을 많이 다루는 편이다.

내 스타일로 창작하는 것도 많고 범용인 것을 모방하거나 인용을 하는 것도 많다.

작업은 대부분이 컴퓨터를 이용하는 편이다.

수기(手記)하는 것도 좋아하고 잘 하는 편이지만 컴퓨터를 이용하여 이용하다보니 그게 습관화됐다.

유명 작가들은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를 이용하여 글을 쓰다 보면 잘 안 써지고 생각하는 바를 잘 표현할 수 없어 잘 안 쓰고 옛 방식대로 원고지를 주로 쓴다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그 정반대이다.

글을 쓰고 수정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길들여졌지만 깊은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많은 양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은 데 남들이 읽어주는 것을 위주로 하거나 인기와 관련된 상업적인 측면에서 고려한다면 피시를 이용하여 편리하게 쓰는 것이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뒤 베란다에 쟁여있는 세라믹 김치 통을 하나 꺼내 잡기장통(雜記帳桶)으로 만들어 책상 밑에 놔뒀다.

휴지통이나 쓰레기통이라는 소리는 많이 들어 봤지만 잡기장통이란 말은 생소한데 고리타분한 것을 잊지 않고 좋아하기도 하는 이 김(金) 선생이 만든 미당 표 연습지통(練習紙桶)이다.

잡기장이란 말은 우리들이 어렸을 적에 어른들이 쓰시던 말이었다.

우리들은 그를 초등학교 때는 공책(空冊)이라 했고,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노트(Note) 또는 학습장(學習帳)이나 필기장(筆記帳)이라 했다.

 

대학원에 다니고 현직에 있으면서 이면지(裏面紙)를 갖다 놓은 것이 수 천 장이 침대 밑에 쌓여 있다.

일부러 가져오려고 한 것은 아니고 학교나 회사에서 마무리하지 못 하고 자료를 갖고 와서 보거나 작업하다가 다시 갖고 가거나 보안상에도 문제가 없는 것들이어서 그냥 집에 놔두게 된 것들이다.

지금이야 번거롭게 그럴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리어카로 하나 가득한 자료일지라도 온라인을 통하여 내 컴퓨터로 송부하거나 USB등을 통하여 가져오면 된다.

 

이면지를 조금씩 써오긴 했다.

갑자기 떠오른 주제에 내용에 대해서 메모 형식으로 초안을 잡거나 서류작성을 하는 피시 작업을 할 때 드래프트하는데 필요했다.

하지만 이면지의 소모량은 발생량에 비하면 극히 미미했다.

많이 쓸 때나 적게 쓸 때나 기껏 해봐야 한 자릿수 이내의 이면지를 썼지만 생산량은 거의 무더기라고 할 정도로 많았으니 절대량이 차곡차곡 쌓일 수밖에 없었다.

 

어림잡아도 수 만 장은 될 이면지가 골칫거리였다.

하루에 몇 장씩 쓰는 것으로 치면 대를 물려 써도 남을 양이다.

하루 몇 장씩 쓰는 인쇄물인데 이면지로 출력하기도 싫고, 폐지로 버리기도 아깝고, 그대로 침대 밑이나 구석진 곳에 방치하기도 곤란했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그 말씀을 갖다 붙이기는 좀 그렇다.

 

그렇게 간절하게 문을 두드린 것은 아닌데 우연히 자연스럽게 그 이면지들을 쓸 일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하루에 몇 십 장씩 이상은 쓸 것이고, 짧게는 반 년 정도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게 써야 할 일거리다.

일 년 내내 가야 편지 한 장 쓰기도 쉽지 않은 세상에 하루에 몇 십 장의 이면지를 써야 한다니 세상에 그게 무슨 변괴냐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만큼 고난의 길인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을 시샘하는 중국발 황사(黃砂)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시점은 따뜻한 남쪽으로 꽃놀이 갈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짓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때이다.

그에 앞서 죽 밀려있는 3월의 행사 소화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심도 해야 하는 판이다.

공사다망(公私多忙)하련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런 고행을 찾아 나섰다니 알다가도 모를 미당(美堂) 선생이다.

 

데보라가 책상 밑에 웬김치 통이냐며 의아해 했다.

간락하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입고된 김치통을 좋게 쓰겠다는 것이 흐뭇한지 한 술 더 떴다.

기왕 잡기장통으로 쓰려면 문구점이나 이마트에 가서 그럴 듯 한 것 하나 사다가 쓰지 보기가 영 그렇다고 하였다.

나도 화답하였다.

통보다는 이면지를 얼마나 요긴하게 쓰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그런 것은 너무 품위가 있어도 안 어울리고 이 김치통을 잡기장통으로 쓰는데 하등의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위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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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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