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자 한다면, 보여줄 수 있다면 빤스까지는 괜찮다.
야단법석 떨 것 없이 조용히 하면 된다.
빤스를 보고자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정작 본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남들이 호기심이 많아 야단들이다.
야시시한 것 같은 데 어떤 색의 무슨 형의 빤스를 입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있을 수 있고, 자기 것이 좋다고 뽐낼 수도 있는 일이니 그를 너무 확대 재생산하여 부풀리거나 축소 지향적으로 쪼그라들게 할 것은 없다.
남자는 빤스 이외의 것을 상상하고, 여자는 빤스 자체를 연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겉옷 때문에 무슨 빤스를 입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모르는 것이 맞다.
빤스 자체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겠지만 치마에 가려진 멋진 폼은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 심리일 수 있는데 가릴 건 가리고 나타날 것은 나타나게 하여 알 듯 모를 듯하게 만드는 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게 뭐야.
요즘처럼 화끈한 세상에 보여주려면 보여주고 말라면 말아야지.
남들 궁금증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패션만 자랑하려고 한다면 누가 좋다고 하겠는가.
열망에 응답하는 것도 적선하는 것이다.
마지 못 해 치마를 살짝 들쳐 보여주는데 “하나, 둘, 셋!” 하고 나서 눈 깝짝 할 사이에 “끝!”을 외쳐 뭐가 보였는지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게 한다면 궁금증만 더해진다.
0.3초는 너무 하고 3초 정도는 말미는 줘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밀당도 거기까지다.
빤스를 들춰보는 것은 아니 된다.
빤스 속의 살 속을 뒤집어 보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궁금하면 오백 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먹이 날아오거나 현행범으로 잡혀가 패가망신할 수도 있다.
빤스 훔쳐보기나 보여주기는 각양각색이다.
빤스 이론은 유불리를 떠나 매사에서 통한다.
공개할 것은 공개하고, 감출 것은 감춰야 한다.
볼 것은 보고, 안 볼 것은 안 봐야 한다.
그러나 정도도 금도도 넘으면 곤란하다.
책임을 져야 한다.
너무 숨기려 해도 문제고, 너무 알려고 해도 문제다.
변형된 빤스 이론 전개가 계속되고 있다.
여의도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연평도에서 있어서는 안 될 불상사가 발생했다.
민족분단의 아픔을 두고 엉뚱한 논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빤스가 아니고 속곳인데 그를 두고 자기들 주장이 맞는다고 삿대질을 해가면서 얼굴을 붉히는 것이다.
싸우면서 크는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과도한 소모전을 벌여 양측 이마빡에 피가 흐르면 너도 손해 나도 손해다.
빤스까지는 괜찮다.
하나 그 선을 넘으면 아니 된다.
모든 것은 다 드러나게 돼 있다.
수준 있는 진실 논쟁은 필요하고, 수준 낮은 진위 전쟁은 필요 없다.
불의의 사고로 가신 분의 명복을 빌면서 상식이 통하는 조치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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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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