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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내 고향 - 장평면 미당 ④

by Aphraates 2024. 10. 27.
그리운 내 고향 - 장평면 미당 ④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4.05.13 14:05
  •  호수 1542

미당찬가(美堂讚歌) 고찰(考察)

홍성재 전)대전 둔산문경서적 대표

왕진나루서 유입된 여러 물품 
미당시장서 유통되면서 ‘번창’

옛날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고 수상교통에 의존하던 시절 강경포구는 어느 정도 큰 배가 접근할 수 있어서 많은 물류가 강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강경은 전국 3대 시장으로 발돋움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보다 작은 배는 왕진나루까지만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경포구에서 상품들을 작은 배에 싣고 뱃길 따라서 상류로 올라오다가 수심 때문에 더 이상은 올라갈 수가 없고 왕진나루까지만 올 수가 있었기 때문에 왕진나루에 하역한 많은 물품은 창고에 보관했다가(우리가 청남국민학교에 다닐 때 왕진나루 배 턱 위 언덕배기 아래에 나무로 된 낡고 쓰러져 가는 창고가 있었는데 뱃사공의 아들인 친구 최영일 씨 말에 옛날 창고였다고 했습니다) 소, 말, 노새 등으로 물건을 미당(미륵당)시장으로 운반해 오게 되니 다종다양한 많은 상품이 들어오면 그에 따라 인근 면의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조선시대부터 미당시장이 큰 시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엔 도로를 신작로(新作路)라고 불렀습니다. 
도로가 없던 것을 일본이 새로 도로를 뚫었기 때문이었고 아마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 그때까지 신작로라고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신작로가 뚫리고 물건의 운반수단이 갖춰지기 전까지, 또 왕진나루를 통한 물류시대가 끝나기 이전까지는 오랜 기간 미당장이 청양장보다 더 컸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청양과 같은 원님고을이었던 정산장이 미당장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았던 것과, 또 하나 나의 큰아버님이 1920년대에 미당양조장을 창업하셨는데 미당양조장은 청양이나 부여보다 먼저 생겼다고 합니다. 

전국 술 품평회서 두 번이나 1위
당시 미당양조장은 부여와 청양까지 술을 배달해야 되기 때문에 자전거 배달부가 2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미당장 때문에 힘입은 바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당양조장에서 제조한 약주가 일본총독부 주관 술 품평회에서 전체 조선에서 두 번이나 1등을 했던 영광스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1911년부터 매년 ‘신주(新酒)품평회’를 열어 술의 발전을 도모해 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 후 왜정시대 조선총독부 주관 전선(全鮮, 전체조선) 술 품평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미당양조장의 약주가 ‘조선신주품평회’란 이름의 대회에서 2번이나 1등을 차지해 미당양조장의 약주는 날개 돋친 듯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서울도 아니고 평양도 아니고 부산도 아닌 청양군 적곡면(현재 장평면) 미당리 작은 시골 마을에서 제조한 약주가 전국에서 2번이나 1등을 했다니 이건 놀랄만한 하나의 사건입니다. 
미당양조장의 약주는 평양 함흥까지도 진출을 했다는데 술 판매업자들이 미당양조장 약주의 품질이 워낙 뛰어나게 좋았기 때문에 고급술인 정종으로 둔갑시켜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 약주는 우리 아버님께서 직접 개발한 술이었는데 조선신주품평회에서 2번이나 우승한 상장은 개발자인 아버님 존함이 명시되어 있어 아버님이 보관해 두셨는데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까치내로 동네 사람들 대부분 피난 가기 직전 일제강점기 받은 그 상장이 안위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나의 둘째형님과 함께 소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아버님으로부터 품평회에서 1등을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상장을 소각하는데 함께 참여한 둘째형님은 그 상장에 2등으로 기록돼 있었다고 회고 했으나 아버님이 1등이라고 거짓 말씀을 하셨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둘째형님이 당시 서울의 덕수중학교 1학년 입학한 직후인 아직 어렸을 적이어서 잘못 봤거나 기억에서 오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국에서 1등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미당 동네가 들썩할 정도로 마을사람들이 나와서 풍물을 치고 축하해 줬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식량소비 억제정책으로
인근지역 양조장 미당양조장에 통합

그 후 세수증대를 위한 양조장 개설 허가가 쉬워져 1930년대 중후반에 청남면 인량리의 호족인 한노수 씨와 적곡면 분향리의 호족인 임동선 씨가 양조장을 새로 개설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조선총독부의 식량소비억제정책으로 모두 미당양조장에 통합하게 되어 주인이 여럿 될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의 양조장이 주인이 혼자보다 복수인 경우가 많았던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후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군량미 문제로 통제를 받아 마음대로 술을 빚을 수가 없었으며 큰아버님이 1941년 말경 오랜 지병으로 돌아가시게 되니 수년 동안 양조장을 실질적으로 경영하며 고생을 했고 위에서 기록한 것처럼 나의 아버님이 질 좋은 약주를 개발하여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 공로와 큰아버님 아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직장을 갖고 있었고 전답 등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의 결정으로 양조장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막내동생인 나의 아버지에게 양조장을 상속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었으나 미당양조장(후에 청남양조장으로 이전개명)은 공주세무서 관활 양조장 중에 언제나 공주, 청양, 공주시 유구에 이어(유구와 근소한 차이) 네 번째로 매출이 많은 양조장이었는데 그 또한 전적으로 미당장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개인의 문제인 양조장을 거론한 것은 미당양조장은 초창기 광산업을 제외한 개인 기업 중에선 청양군 제일의 기업이었고 미당시장과 함께 발전하고 운명을 같이 해온 미당 역사의 일부였기 때문에 적은 것이오니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 
또한 진령군이씨는 분명 왕실을 능멸하고 정사를 어지럽힌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인물이지만 그런 역사 속의 인물이 오랫동안 미당에 거주 했었다는 사실은 미당의 향토역사에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일이기에 장황하게 기술했음을 깊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GA2ZV1NXJXQ?si=5VEXuizrz9QVqWbo

TJB화첩기행 청양편 - 칠갑산에서 연주한 칠갑산 ,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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