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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갈마동

by Aphraates 2025. 3. 23.

갈마동은 둔산동 이웃 동네다.

대전에서 공주 가는 원래 길인 계룡로를 경계로 하여 둔산동은 동쪽이고, 갈마동은 서쪽이다.

행정구역상으로 같은 서구(西區)이다.

그러나 썩 잘 어울리는 두 동네는 아니다.

갈마동은 몇 개의 구릉지대로 이어지는 기존 주택 지역이고, 둔산동은 평지를 밀어 신시가지로 조성한 행정타운과 아파트 단지다.

미당 선생의 문화동 학교 시절에 갈마동은 원주민들이 사는 주택이 드문드문 있었고, 둔산동은 허허벌판과 군부대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 급이라 하겠다.

 

갈마동은 고즈넉한 동네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심란한 동네였다.

사람 하군......, 평가가 왜 그렇게 오락가락하며 자발이 없는겨.

나이도 있고, 잘 지내고 있는 이웃과 이웃인데 왜 그렇게 오뉴월 팥죽 끓듯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인지 자숙하시오.

 

글쎄올시다.

밑도 끝도 없이 내지른 동네 평이지만 지탄받을 정도는 아니다.

나무라는 것은 오해와 곡해다.

들어봐야 알 수 있는 아련한 이야기가 있다.

 

미당 선생은 충남 청양의 칠갑산 자락 가난한 농촌의 아들이다.

늘 그렇게 말한다.

좋게 말하면 촌자(村者)이고, 좀 안 좋게 말하면 촌놈이다.

오랫동안 한 자릿수 학생으로 가까스로 연명하다가 올해 폐교가 된 미당국민학교 출신이다.

이어서 공주 중학교와 대전의 충남 기계공고를 거쳐 나중에 노학동으로 한밭대학교(대학원)에서 공학(전기)학사와 석사를 했다.

 

직업과 직장은 오로지 하나였다.

전기인(電氣人)KEPCO Man(캡코맨, 한전인)이었다.

1977년에 불공정에 입사하여 2012년 정년퇴직 때까지 전기 기술직으로 고향인 청양과 대전 지역을 오가며 근무했다.

퇴직하여 재취업하고서도 충청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소속사와 임지가 경상도와 전라도와 충청도로 바뀌긴 하였으니 주된 소재지는 대전이다.

사회생활 전체가 대전-공주-청양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상이었다.

정년퇴직 13년 차인 지금은 36번 국도 끝자락인 보령 대천에서 일하고 있는데 35년여만의 귀향(歸鄕)인 셈이다.

다음 주에는 촌스럽지만 자랑스럽게 서슴없이 말하는 청양쫄(靑陽卒)이라고 하는 청양 전력 소 출신들이 대천 해수욕장에 모여서 한판 벌이기로 했다.

많은 OBYB가 참석하진 못하겠지만 울고 왔다 울고 간다는 청양 칠갑산의 좋은 추억과 아름다운 그리움을 나눌 것이라 믿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볼 때 갈마동은 신나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한 동네다.

갈마동은 청양 촌자의 대전 유학 생활과 관계가 있다.

대전에서 쌀 7 말을 내고 처음 하숙한 곳은 선화동 충렬탑 아래다.

() 대전문화방송과 현 교보빌딩과 경암빌딩(구 중도일보) 위이고, 옛 충남도청과 현 대전 중구청 뒷동네다.

 

학생 하숙생은 피 교육생이다.

늘 춥고 배고팠다.

어린 촌놈의 당신 인구 30만의 대도시인 대전 생활은 애처로웠다.

그만큼 고향이 그리웠다.

토요일만 되면 오전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공부고 친구고 다 때려치우고 엄마와 가족들이 기다리시는 미당 집으로 향했다.

옛 대전시청 옆의 보안대(충남기업사) 건너편에 있던 대흥동 시외버스 차부(현 대림빌딩)로 달려가 하루에 두 번 있는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늘 만원이라서 자리에 앉을 생각을 못 했다.

행여 자리가 있어도 어른들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때라 꼬박 서서 2시간(?) 넘게 서서 갔다.

그래도 차부에서 버스를 타면 신났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집에 간다는 것 하나로 모두가 커버됐다.

대전-공주 버스 노선은 비포장 공암길과 포장된 대평리(세종, 1번 국도)였는데 공암으로 해서 가는 길이 미당 가는 버스 길이었다.

대흥동을 출발한 버스는 서대전 오거리-수침교-파란 바탕의 별 하나 부대인 공군기교단(현 한우리아파트)-빨간 바탕의 별 하나인 통신학교(현 큰마을 아파트)-빨간 바탕의 별 두 개인 3관구 사령부(현 향촌아파트)-월평동 산자락 신신 농장-만년교-유성-덕명동-계룡산 삼거리 박정자-공암-공주-정산-미당-부여 세도로 오갔다.

 

이 길에서 첫 번째 넘는 고개가 야트막한 갈마동 고개다.

현재의 동산 아파트 앞 굴다리다.

출발하여 그 고개를 넘을 때면 신바람 났다.

잘 있거라 대전이라고 작별 인사 아듀를 고하는 것은 아니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되돌아와야 한다.

되돌아 대전으로 오는 길에 갈마동 고갯길은 심란했다.

대전에서 미당 집을 향해 갈 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돌아오는 길에 갈마동 고개가 보이면 풀이 팍 죽었다.

갈마동 고개는 말이 없는데 신나는 토요일에서 우울한 일요일로 둔갑하는 것이다.

 

애환이 깃든 갈마동 고갯길이다.

갈마동 고갯길 동네에 정착한 것은 지난 1995년이다.

지금도 거기에 있는 육교를 건널 때는 육교 중간에 서서 유성 쪽과 서대전 쪽으로 번갈아 내려다보며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얄궂은 운명의 역설이기도 한데 어찌하다 보니 그리됐다.

 

전민동 한전 연구원 사택에 살다가 보령 대천변전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가능한 빨리 집을 비워줘야 했다.

부동산도 모르고 돈도 없었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고향 가는 길목에 자리한 집을 찾았다.

그러다가 자신 있게 추천하는 복덕방의 권유에 따라 3관구 사령부 갈마동 비행장 자리에 있는 이름도 촌스러운 향촌 아파트에 눌러앉게 됐다.

 

성당은 자연스럽게 갈마동 성당이었다.

향촌은 둔산동인데 왜 갈마동 성당인지 의아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새로 들어선 신시가지와 성당 관할 구역을 나누면서 선의의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선거구 나누기)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갈마동 성당 30년이다.

1980년대 중반에 청양 성당에서 영세했다.

대전의 옥계동-도룡동-대화동-전민동을 거쳐 갈마동에 안착했다.

신앙인으로서 잘살았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죽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만도 크나큰 은총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주시라고 청한다.

당신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따라가면 될 것이다.

 

정년퇴직하고서도 전문직으로 일하고 있다.

앞으로 언제까지 할 것인지 모르지만 계속될 것 같다.

여기저기 떠다녀도 주말이면 오는 집은 향촌이고, 성당은 갈마동이다.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게 죄송스러운데 그도 당신께서 점지해주신 것이니 순명한다.

신앙 생활이고 직장 생활이고 덜도 더도 말고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죽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은 본당의 날이다.

아주 중요하고 즐거운 날인데 미사 참례를 할 수 없게 됐다.

주말과 주일도 없는 공정(工程) 때문에 현장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웬만하면 오늘 같은 날은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밥 한 끼라도 함께 하며 소맥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 것인데 화중지병(畵中之餠)이 되어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으니......, 그도 당신 뜻이라 편하게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짜증이 난다.

 

그래서 짜증 나면 어쩔 건데.

어쩌긴 뭘 어째.

말이 그렇다는 것이니 토 달지 말고 넘어가십시다.

 

 

https://youtu.be/cEmbE3J_vtc?si=xmka4oYV2QsrTAyA

봄이 오는 고갯길 - 문주란(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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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공학석사/전기안전기술사/PMP, 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국내여행안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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