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얼대며 보채던 아이도 제들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있도록 해 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잘 놀 때가 있다.
어른들은 낯서른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탐색하느라 어색하지만 어린애들은 안 그렇다.
어른들한테는 낯을 가리고, 자기들은 한 번도 같이 만나거나 놀아본 적이 없지만 제들끼리 뭐라 하고 까르르 웃으면서 잘 노는 것은 신통방통한 일이다.
우리들의 영원한 새 박사이신 원병오와 윤뮤부 교수님께서 새들이 재잘거리는 것은 사람들이 볼 때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행동이면서도만 자기들끼리의 의사소통이라고 하였듯이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끼리 만나면 왜 그렇게 잘 노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런 생각이 없는 아이들 같으나 본능적으로 제들끼리는 뭔가 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사투리가 심한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사람들은 물론이고 누가 통역을 해 주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토속어를 쓰는 제주도나 이북 사람들은 자기 고향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할 때 보면 사투리 투성이다.
객지에 나와 몇 십 년 살았으면 고향 사투리를 잊어버릴 만도 한데 자기들끼리 만나면 사람이 달라 보일 정도로 완전한 본토 발음이 나온다.
고향사람들을 만나면 반갑고, 태어나서 본토 발음에 익숙해질 때까지 자라난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 거 같다.
평소에는 사투리를 안 나오게 하려고 신경 쓰던 사람도 고향과 고향 사람들과 연관된 것이 나타나면 그 때는 체면이고 뭐고 없이 자연스럽게 사투리가 나오는 것인데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가 한다.
하기사 어렸을 적에 오리지널 충청도 격인 칠갑산 고을을 떠나 표준어 지역인 서울과 삼남의 교차지점으로서 준 충청도라고 할 수 있는 대전에서 기 십년을 살아온 나도 아직 충청도 사투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래도 객지를 나다닌 것이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충청도 말이라고 표 나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같은 외지 사람들은 물론이고 충청도 사람들까지도 전형적인 충청도 말을 쓰고 있다고 해서 놀랜 적이 있다.
전에 내 인근에 유명한 3포(砲)가 있었다.
입심이 어찌나 세고 술술 잘 나오는지 모를 사람들이었다.
그들 셋은 형님 아우 하면서 의기투합(意氣投合)하고 잘 통했다.
어디 가서도 지지 않는 입심을 가진 그들이어서 무슨 문제가 있어서 입씨름이 붙으면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을 각각 떼어 놓으면 덜한데 어떤 때는 그들 셋이 모여 물 만난 고기처럼 남들이 인정해주지도 않는 포를 쏴대고, 어떤 때는 자기들끼리 한 구석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파안대소하며 시간가는 줄 몰라 한다.
그를 본 사람들은 웃으면서 역시 포들은 포들끼리 통하고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며 간섭했다가는 말 그대로 십자(十字) 포화를 받아 본전도 못 뽑으니 아예 모른 체한다.
위의 예는 초록동색(草綠同色)의 면면을 나타내는 모습들이다.
같은 성향의 사람끼리는 잘 안 맞아 외면하는 경우도 있고, 같은 극(極)끼리는 도저히 합쳐질 수는 없는 경우도 있지만 같은 처지의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제는 정치지향적인 두 아우님과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쿵짝이 잘 맞아 돌아가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나도 현실 정치에 참여하거나 시비를 논할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가만히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감각은 있다고 장담하는 편인데 척척 맞아 돌아가는 두 사람을 보니 재미있었다.
비록 두 아우님의 정치적인 노선은 다를지 몰라도 정치라는 커다란 바운더리는 같은 지 신나게 이야기 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역시 초록은 동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진작에 좀 만나서 정치에 대한 꿈의 나래를 폈더라면 뭔가는 작품이 나왔을 텐데 아주 늦은 것은 아니나 팔 벗고 나설 때는 지나가고 있다는 아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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