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부터 구두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그렇다고 왜 그런 것인지 반드시 그 궁금증을 풀어야 한다거나 그로 인하여 생활에 지장을 받기 때문에 해소시켜야할 급박한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막연한 궁금증이고, 그 때 뿐이지 지나고 나면 잊게 되는 것이다.
그 것은 구두는 운동화처럼 왜 빨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구두 빠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구두 속에 작은 돌 같은 이물질이 들어가 불편하면 벗어 거꾸로 들고 두드리며 털어내고, 실족하거나 술에 취해서 구두가 물에 젖어 말리고, 구두약을 칠하고 침을 탁탁 뱉어가며 문질러 광을 내고, 굽이 달아 한 쪽으로 기울거나 꿰맨 곳이 터지면 수리하면서 여태까지 많은 구두를 신었지만 어떤 구두가 되었든 간에 한 번도 빨아본 기억이 없다.
구두는 가죽제품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때가 타면 탔지 청결해지거나 기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벗어 놓으면 자연적으로 햇볕이 들고 통풍이 되어 살균과 냄새 제거가 되는 것에 의존하고 세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수명이 다 되어 버릴 때까지 잘 신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구두의 이웃사촌인 양말은 매일매일 벗어서 빨고, 구두가 수명을 다 하는 기간 정도라면 옷은 수 백 번을 빨았을 텐데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것 같고, 사람들이 발(足)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무관심이고 구박을 당하는 구두이다.
또한 귀한 것이어서 부자들이나 신었지 가난한 집 사람들은 나도 저런 구두 한 번 신어봤으면 하는 추억이 깃든 구두지만 지금은 운동화 한 켤레 값만도 못한 흔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견디어 내면서 주인의 발을 보호하여 몸 전체를 편안하게 해 주고, 주인의 품위를 높게 해 주는 구두는 무던하기도 하다.
구두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오늘은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하려고 한다.
문단의 모임에 나갔을 때다.
한 작가가 구두도 아니고 운동화도 아니 투박한 것을 신고 왔다.
그런 신을 신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될라 서 안 것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나오면서 다들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 작가는 신이 없어서 못 나왔다.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작가가 맨발로 왔을 리도 없고, 아무리 좋은 신이라도 남들인 신던 것은 노터치라는 것이 무색하게 남들이 신고 갈 만큼 좋은 신을 신고 왔을 리도 없고, 개가 들어와서 물어간 것도 아닐 텐데 분명히 식당 입구에 벗어 놓은 신이 없는 것이었다.
이상하다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저 편에서 초로의 식당 여종업원이 그 신을 꺾어 신고 들어오면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었다.
그 작가가 그 녀의 아래를 바라보면서 “어, 내 신!” 하였다.
그러자 그 녀가 깜짝 놀라서 “화장실 다니는 식당의 허드레 신 인줄 알고 신었는데 손님 신이었군요. 죄송합니다” 하면서 얼른 벗어 주었다.
그 신을 보니 화장실 갈 때 질질 끌고 가는 신이라고 그런 오해를 받을 만도 했다.
볼품이 없고, 나른 나른하고, 색이 바랜 것이 내다 버리면 그대로 방치되어 없어질 정도의 신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커피 타임을 가지면서 환담을 하는데 그 남루한 신의 정체가 궁금해서 그게 무슨 신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작가가 웃으면서 “몇 년 째 신지 않고 신장에 있던 딸아이의 캐주얼화인데 내가 신을 것이 마땅치 않아 손에 잡히는 대로 신다보니 그 신이었요. 돈이 있네 없네 해도 아이들은 수시로 새 것을 사서 신지만 어매는 다른 것 챙기다 보면 그럴 수가 있나요? 애들이 신다 버린 거 다 주어 신는 거지요 뭐. 처녀시절에 질질 끌고 다니던 천덕꾸러기 같은 랜드로버 하나 살 여유가 없으니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작가가 “사는 게 다 그렇지 누구라고 별 수 있나요 뭐. 더 큰 속이나 안 썩고 살면 다행이지요” 라고 하였고, 또 다른 작가가 “애비는 포장마차에서 소주 마시고, 아들은 카페에서 양주마시고 하지만 별 불만 없이 잘들 사는 것을 보면 그게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는 거겠지요?” 라고 하여 다들 파안대소하였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나서 내가 “신이야 아무렴 어때요. 구색에 맞춰 신다보면 어디 한두 켤레 갖고 돼야 말이지요? 그래도 기본으로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시내 나가다가 신 하나 사 드릴까요?” 하고 농을 걸었다.
그러자 그 작가가 “신 사주면 도망가라는 의미라는데 아직 그러기는 싫은데요.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라고 되받아쳐 당하여 다시 한 번들 크게 웃었다.
지금도 생존한 인물인지 모르지만 필리핀의 퍼스트레이디 이멜다 여사는 구두가 수만 켤레였었다는 데 구두 수집가가 아닌 사람이 그랬다는 것은 사치가 심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요즈음은 구두 제품도 질이 좋아지고 튼튼하여 구두가 질려서 버리기는 해도 수명이 다하여 버리는 경우는 없어서 구두 몇 켤레면 평생을 신는다.
나는 신이 몇 개인가?
정장 구두 6개, 랜드로버 1개, 등산화 2개, 운동화 1개, 작업화 1개, 군화 1개이니까 11개이니 적지 않은 숫자다.
그런데 다른 신은 특수한 목적의 신이니 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거 없고, 보통 신이라고 하면 일상적으로 시는 구두를 말하니 정장 구두에 대해서 살펴봤더니 웃음을 자아냈던 작가의 그 요상한 신 못지않았다.
정장 구두는 1980년대 말에 산 검정색 세 개와 밤색 하나인 K제화로서 굽을 몇 번 갈은 구식 디자인이지만 아직도 성성하여 몇 년을 더 신을지 모른다.
그리고 비교적으로 최신제품인 것이 2000년대 초에 산 역시 K제화인 예물 구두와 여름 구두인데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새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신을 사람만 있다면 대를 물려 신어도 될 정도이다.
그런 신에 대한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다른 곳에서의 문단 모임에 갔을 때는 내 구두가 화젯거리가 되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모임에 나가다보니 나도 모르게 제일 오래된 구두를 신장에서 꺼내 신고 나갔다.
그런데 다른 작가들이 내 구두를 들어 보이며 “이런 구두는 인사동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희귀품인데 김 작가님께서 신고 오셨네요. 이런 귀중한 신을 아직도 신고 다니시다니 한 턱 내셔야겠습니다” 하면서 놀렸다.
그러자 몇 달 전에 딸아이의 이상한 신을 신고 왔다가 나한테 한 방 먹었던 작가가 내 구두를 물끄러미 쳐다보니 “야, 진짜 완전히 골동품이네. 이게 언제 적 신이지요? 저렇게 구두 앞이 무뚝하니 무슨 무기 같기도 한데 발가락은 안 아프세요? 뭐 불만이 있으신지 그 신을 신는 것은 세상에 반항하시는 거 같아요. 에이, 그러시지 말고 사모님께 신식 구두 하나 사오라고 하세요” 하면서 웃었다.
그래서 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노 프러브럼” 하면서 내 구두와 다른 작가들의 구두를 비교해봤더니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내 구두는 생김새 자체가 우중충한 것이 정말로 골동품같이 보였다.
구두가 그렇다보니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돈에 인색하지 않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니 별 문제가 없고, 시대흐름과 현대감각에 충실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지만 이 십 여년 된 구두를 안 버리고 소중하게 여기며 시는 구시대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데보라한테서 구두 때문에 피난도 여러 번 들었다.
데보라가 집에 없어 내가 옷을 챙겨 입고 나갈 때 최신식 양복을 입고 그 골동품 같은 구두를 신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골동품 같은 내 구두에 대해서는 거리끼는 마음이 없으니 아전인수 격이겠지만 신구조화(新舊調和)의 미를 아는 것 같기도 하다.
김 작가님, 신고 계신 그 구두 완전히 골동품이네요.
그래요?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 하지만 편하고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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