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여행, 무전취식, 무전연애를 낭만적인 것으로 여기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은 참 어려웠다.
돈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욕망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지의 땅으로 여행을 하고도 싶었고, 주린 배를 채우고도 싶었고, 이성이 만나 사랑을 하고도 싶었다.
그렇게 하고는 싶은데 할 수 없는 여건에서 욕심을 채우던 것이 차비 한 푼도 없이 무작정 떠나는 무전여행이었고, 동전 한 푼 없이 당당하게 식당에 들어가 푸짐하게 때려 먹는 무전취식이었고, 허름한 다방 커피 한 잔 마실 형편이 못 되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공원 벤치에서 정열을 불태우는 무전연애였다.
무전...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러리니 하고 넘기기 일쑤였는데 그렇다면 그냥 조용히 넘어갔는가?
그렇지는 않았다.
능력과 대책이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했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공짜 차를 탄 대신에 운전수의 잔심부름을 하고, 공짜 밥을 먹은 대신에 배달꾼 노릇을 하고, 무일푼인 주제에 사랑을 구했으니 이별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무전...이 사회적인 병폐현상으로 취급당하여 사적인 린치를 당하거나 경찰서로 넘겨지는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다.
사회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너그럽게 봐 주고, 당사자들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추억으로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런 무전...들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지금 그랬다가는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전과자가 되기 때문에 그를 감내하면서까지 무전...의 호연지기를 지킬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무전...을 좋아한다면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외상거래는 없을 것 같은 업소에 “저의 업소는 절대로 외상을 하지 않습니다” 하는 안내문을 붙이게 만드는 사람들, 그만한 부자라면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고도 잘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별의별 기발한 방법을 다 써 가며 세금을 외상(포탈)한다는 기사의 주인공들인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낭만적으로 봐 줄 수 있는 무전...하는 사람들을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며 인심을 험악하게 하고 있다.
물론 오늘 나처럼 본의 아니게 무전취식을 하고, 사람이 어디 들어갈 때 하고 나올 때 틀리다는 식으로 변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거야 애교로 봐 줄 수도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겨울 날씨 답지 않게 비도 구질구질 내렸다.
이런 날에는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앉아서 방금 부쳐 온 빈대떡을 먹으면 제격일 텐데 그럴 형편은 못 되는지라 뭐 따끈한 것이라도 먹어 보려고 회사 근처의 손칼국수집에 갔다.
바지락과 호박과 쑥갓이 들어간 칼국수에 벌건 다되기를 넣어 김장김치를 곁들여 먹으니 별미였다.
따스한 방바닥에서 멀리한지 오래 된 C일보를 들척이며 칼국수를 맛있게 먹다가 뒤통수가 이상해서 만져봤더니 땀이 밴 것이었다.
딱딱하고 질긴 거야 못 먹은 지 오래 되었다 치더라도 이제는 맵고 뜨거운 것도 잘 못 먹어 그런 것을 조금만 먹으면 나도 모르게 땀을 흘리다니......, 그게 건강하다는 증거라는 말로 듣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웬만한 식당은 다들 파리 날린단다.
그런데 찾기도 어려운 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오막살이 식당에 웬 손님들이 그리 많은지 남자 종업원 둘이 전화 받으랴, 배달 나가랴, 서빙하랴 정신이 없었다.
단체 손님도 방에 가득하여 시끌벅적했다.
이럴 때는 손님 하나라도 빨리 먹고 나가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고, 식당이나 어디를 가더라도 볼 일만 보면 일어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서 국물 속에 남은 바지락 몇 개를 골라서 까먹고 국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돈을 주려고 지갑 전용 호주머니인 바지 왼쪽을 만져보니 지갑이 업이 허전했다.
그러고 보니 정장 양복을 입고 출근하여 허드레 바지로 갈아입고는 지갑은 양복바지에 두고 그냥 나온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서 배달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종업원한테 지갑을 안 갖고 나와서 그런데 다음에 갖다 주겠다고 하였더니 웃으면서 그러시라고 하였다.
본의 아니게 무전취식을 한 것이 영 찜찜했다.
차에 가서 동전이 있는지 봤다.
그렇지만 박스에 가득하던 것을 며칠 전에 돼지 저금통으로 옮겨서 자칫하면 칼국수 값은 될 거 같아서 세어보니 모자랐다.
회사에 들어와서 양복 호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꺼내 만지락거리니 칼국수 값을 바로 갖다 줘야겠다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급한 것도 아닌데 저녁 퇴근할 때나 내일 갖다 주지 뭐 하는 생각이 들었고, 차량 비상금으로 만 원 짜리 몇 장은 차에 둬야겠다는 것도 뭐 그렇게까지 철두철미하게 준비할 것이 있느냐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다급할 때는 별의별 짓을 다 할 거 같더니 안정이 되니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확 돌아서 버린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사람이 그렇게 간사해서야......,
사람이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변해서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신용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사소한 것이어서 무전취식으로 인하여 미안하다거나 죄책감이 든다던가 하는 것은 없었다.
우연히 일어난 단순한 실수이니 시정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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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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