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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진풍경(珍風景)

by Aphraates 2008. 11. 26.

상(上)할머니 : 우리는 삼 백 포기 했는데도 부족한 거 같은데 댁은 얼마나 했소?

중(中)할머니 : 그러게요 할머니 댁은 부족할 거 같더구먼요. 좀 더 하실걸 그랬나봐유. 저희는 사 백 포기 했는데 넉넉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맞는 거 같아유. 요즈음 아이들은 김치를 잘 안 먹는다고 하더니만 왜 그렇게들 김치 욕심이 많은지 더 가졌으면 하는 눈치들이 선연하더라구유. 김치 잘 익힐 줄도 모르고 잘 해 먹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김치 많이 갔다 쟁여놔봤자 그대로 남기기 일쑤인데 그래도 어렸을 적에 봐 오던 풍성한 겨울 양식에 대한 생각은 남아있는지 한 포기라도 더 가져가려고 하더라니까유.


상(上)할머니 : 그러믄유. 우리네야 겨울 양식치고 김치만한 게 어디 있수?김치 반찬 하나면 끝이고, 좀 밥맛이 없다 하면 김치 하나로 얼마나 많은 반찬을 만들어 먹었수? 지금은 애들이 별미로나마 가끔 먹어보는 것들이지만 우리 입맛에는 아무리 좋은 다른 반찬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이 김치인데 김치 맛들이나 좋아야 할 텐데 걱정이구만유.

중(中)할머니 : 날씨는 적당한 거 같으니 김치 맛도 좋을거구만유.


지난 주일에 청양 본가로 김장하러 갔었다.

나는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아이들이 이웃집 감나무에서 따 온 발간 홍시를 먹으며 시원한 무우국 끓이는 화부(火夫) 역할을 하였다.

그 때 옆에서 동네 할머니 두 분이 점심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며 한가롭게 그런 이야기를 나누셨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겨운 소리였는데 객지에 나가 있는 가족들 몫까지 단체로 하여 가져가는 김장이 있어 그런 기회가 있는 것이었다.

동네 주민이라고 해 봐야 꼬부랑 할머니와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 몇 분이 전부여서 날이 갈수록 지난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쓸쓸해지는 시골이지만 잊혀졌다가 다시 풍성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김장이 아닌가 한다.

김장은 식생활 습관이 현대화되면서부터 별 무게를 안 뒀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김장이 또다시 커다란 집안 행사화 되어 김장 철이 되면 웬만한 명절 때보다도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고 더 푸짐하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조금씩 하던 김장 아니, 김치 담그기 정도였던 것이 지금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실질적으로 고생하는 여자들도 피곤하다고 인상은 찌푸려도 복고풍으로 돌아온 김장 풍경에 대해서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굴레를 벗어난 한 사람의 촌부(村夫)가 되어 김장 잔심부름을 하며 얼찐하게 취해있는 남자들은 기분 좋다.

김장 같은 것이 너무 잦으며 안 되겠지만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그런 날이 있었으면 하는 눈치는 여자고 남자고 마찬가지였다.


집집마다 후덕하고 풍성한 김장 분위기가 살아나 겉으로는 느낌이 좋다.

허나 속으로는 아픔이 있기도 하다.

김장하는 전 날부터 집안 식구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사돈에 팔촌과 떨어져 있는 사촌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큼 가까운 친척은  함께하고자 모인다.

그렇게 귀향하여 모여서 오랜만에 오붓한 정을 나누는 것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그러나 자기들 김치를 담가 갈 형형색색의 김치 통이나 커다란 김장 통을 들고 내리는 모습은 좀 얄밉상스럽기도 하고, 하루 이틀 시끌벅적하게 다들 떠나가면 다시 적막함이 감도는 것이 아쉽다.


우리는 청양의 미당 본가에서 여덟 집 분의 김장을 하였다.

그리고 각자 차에 가득 싣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차 뒷좌석과 트렁크에 김치를 비롯하여 김장하고 남은 배추, 무우, 생강 등을 차가 착 가라앉게 가득 싣고는 대전 향촌으로 왔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면서 보니 김장의 진풍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파트 출입문 앞에 주차를 하고 김치 통을 내려 가족들이 함께 나르는 집이 여러 집이었다.

아마도 그들도 주말을 이용하여 시골 누군가의 집에서 김장을 해 갖고 와서 나르는 것 같았다.

데보라의 이야기를 들으니 평일에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보는데 주말이라서 그런지 유독히 많다는 것이었다.

시골에 연고가 없거나 있어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집 빼고는 대부분이 시골에서 김장을 해 오는 것 같다.

그렇게 김장을 많이 해서 나누는 것이 편리하고, 김치 맛도 좋다고 한다.


김장하는 풍경은 정겹다.

그리고 김장하여 나르는 풍경은 진풍경이다.

정장을 하고 점잖게 사무실로 출근하던 신사 양반도 청바지에 허름한 파카를 입은 채로 김치 통을 구루마에 싣고, 뽀얗게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다니던 멋쟁이 여자도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몸빼와 빛바랜 조끼 차림의 국밥집 아줌마 차림으로 트렁크에 머리를 쳐 박고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고, 얼떨결에 김장 담그는 행사에 동참했던 아이들은 그러는 어른들이 창피하고 귀찮다는 듯이 잔뜩 골이 나서 옆에 서 있다.

그런 모습을 화폭에 담으면 적어도 국선 입상 제품은 될 거 같다.

그러나 반짝 살아난 김장 풍경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 하고 머지않아 또다시 흘러간 옛 노래가 될 것이 뻔한데 그래도 그런 추억과 아름다움은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장의 진풍경을 보면서 들짐승들이 겨울 식량을 물어 나르느라고 바삐 움직이듯이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다들 먹고 살겠다고 그러는 것이고, 그게 다 자연의 섭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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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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