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머니일까?“ 라는 매일 미사 책의 ”오늘의 묵상“1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레지나 대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나는 길이니 잠깐 후문 쪽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데보라가 어머니 삼우제(三虞祭) 지난지가 삼일 밖에 안 되는데 무슨 일로 발걸음 하셨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내려가서 조금이라도 위로를 해 드려야겠다며 겉옷만 걸치고는 헐레벌떡 나갔다.
현관에서 신 신는 사람 등 뒤에 대고는 어머니를 여읜 맘이 엄청 슬프실 텐데 진지하게 위로좀 해드리라고 일렀다.
그런데 조금 있다 바로 돌아 왔다.
왜 얘기 좀 더 하고 들어오지 그랬느냐고 하였더니 긴 얘기 할 상황이 아니었다면서 작은 백화점 쇼핑백을 하나 힘없이 내려놓고는 “대모님께서 엄마 맘이라며 주시네” 라고 하였다.
어서 풀어보라고 했더니 아무 말 없이 가위로 정성스럽게 포장을 뜯었다.
남녀 검은 양말 두 켤레였다.
대모님 어머님 생시에 우리 부부를 생각하시는 맘이 극진했다는 것을 아시는 대모님께서 생전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주는 사랑의 유품이었다.
먼 길 떠나시는 길에 우리들에게 남기신 신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일부러 그런 것까지 안 남기셔도 그 맘을 다 아는 것을 가시면서까지 이렇게 훈훈한 사랑을 베푸시다니 할 말이 없었다.
갓난이 엄니와 함께 그 어머님의 모습의 주마등처럼 지나쳤다.
간난 엄니가 살아계실 때는 자나 깨나 자식들 걱정뿐인 같은 부모님이라 생각하여, 간난 엄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다고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던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조금이라도 나눠 드리고 싶어서 가끔 찾아 뵐 때 마다 무척이나 좋아하시고 하시고 싶은 말씀도 많은 것 같은 계룡의 그 어머니이셨는데 며칠 상간으로 저승과 이승으로 헤어지고 남겨진 양말 두 켤레였다.
당신은 맨발로 삭풍이 몰아치는 혹한의 북망산천으로 가시면서 이 따위 추위가 무슨 추위라고 따뜻한 양말까지 남기시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메지는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창문을 열고 밖을 봐도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서 갓난이 엄니 사진을 바라보며 여기는 걱정하시지 말고 거기 계신 분들끼리 복을 누리시며 잘 계시라고 부탁드리면서 그렇게 해 주시라고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이럴 때 곧장 듣는 노래를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잠시 뫼시고 있을 때 갓난이 엄니가 정신이 없으셨어도 누가 아들을 불러보라고 하면 “아들아” 하고 귀가 쨍쨍하도록 지르던 소리가 가사로 나오는 장사익 씨의 “꽃구경(독일 공연분)”, 첫 소절인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 설 때에“만 들어도 갓난이 엄니를 비롯하여 가족 친지들의 다정한 모습과 그리운 고향의 모습이 떠오르는 ”비 내리는 고모령(기타반주: 김광석, 노래:주현미)“, 갓난이 엄니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시어 얼마나 허망하고 허전하던지 애 못 새기고 있으면서 듣던 ”그대는 바람(손현희 노래)“ 이라는 노래를 번갈아가며 동영상으로 봤다.
각기 다른 뉘앙스의 노래지만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이 비슷했다.
그 노래들을 들으면서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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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 2015.01.07 굿뉴스-가톨릭정보-매일미사왜 어머니일까? 그냥 내 어머니이다. 가장 가깝고 죽음에 이르도록 갈라질 수 없는 혈연이다. 넘어지면 달려와 일으켜 주고, 끼니를 해결해 준다. 요술 부리듯 어딘가에서 간식도 꺼내 주고, 철 따라 옷 입히며 잠자리까지 보살펴 준다. 항상 내 곁에 있는 분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하고 불렀을 때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 시간에 밭에서 김매고 있을 모습이 떠오르지만 몰아치는 공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고구마 순을 잔뜩 인 채 사립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엄마!” 하며 부를 때라야 마음이 놓인다. 어머니는 짐도 내려놓기 전에 말한다. “그래, 일찍 돌아왔구나!” 이 말을 다른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두려워하지 마! 엄마 여기 있다.”하느님도 그냥 하느님이시다. 주님이라는 믿음이 분명하다면 그냥 주님이시다.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했다. 악령을 추방하시고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는 능력을 가지셨고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푸셨지만, 주님은 그런 기적을 베푸실 수 있는 분으로만 여겼다. 자기 경험 속에 가두어 버림으로써 유령과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을 “뭘 겁내고 그러느냐. 나다. 괜찮다.”로 읽는다. 하느님이 우리의 생각 안에 갇혀서는 유령이 되고 만다. 그것이 두려움의 실체다. 철부지 아이는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엄마를 알아보는데 제자들은 스승의 모습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 이유를 복음서는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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