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천안에서 초등학교 동기동창 모임, 저녁은 아버님 기고(忌故)였다.
아침 일찍 데보라를 미당 본가에 데려다 주고 친구 셋을 픽업하여 천안으로 갔다.
화물차 운전수가 화물을 싣고 갔다가 돌아 올 때 다시 다른 화물을 싣고 오는 것처럼 운대가 맞은 것인데 작은 짐 하나도 인터넷으로 경쟁 입찰하여 보내고 받는 세상치고는 아주 효율적인 차량 배차이자 운행이었다.
운전수인 나로서 혼자 빈 차로 덜렁덜렁 가느니 친구들을 편안하게 데리고 가는 것이 좋고. 승차자인 친구들로서는 맘 놓고 술 한 잔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다.
동창 모임은 우리들이 노닐던 칠갑산에서 모이기로 못을 밖아 놓은 여름 광복절 모임과는 달리 겨울 모임은 수시로 장소를 변경하여 모임을 갖는데 이번에는 친구들 대부분이 살고 있는 고향 청양에서도, 서울에서도, 대전에서도 중간지점이면서 찾기 쉬운 단국대(檀國大) 앞에서 가졌다.
대학촌을 이룬 호수 건너편 캠퍼스를 보면서 산 밑에 썰렁 건물 몇 개로 시작한 단국대 천안 분교였는데 이제는 호수가 낀 거대한 상아탑이 되었다고 세월 무상을 이야기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 춥고도 어려웠던 고향의 겨울, 친구들과의 애증, 가난한 농촌의 자식들로 홀혈단신 객지로 나가 일가를 이루며 성실하고 재미나게 사는 친구들 칭찬과 한 갑이 넘은 지금도 속 못 차리고 형편없이 사는 친구들 걱정,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니니 이제부터라도 모임도 잘 나오고 친구들을 만나며 즐겁게 살자는 소로의 위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하늘 무너지고 땅 꺼지는 탄식의 소리도 있었고, 혼자만 알고 간고 있기에는 아깝다면 함께 나누자고 파안대소하는 소리도 있었다.
많은 얘기들의 결론은 가난하고 어려웠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는 한 마디였다.
저녁에는 서울에서 내려오신 가족들과 합류하여 본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후손들의 편리대로 좀 일찍 지내는 제사여서 아버님과 어머님께 죄송스러웠지만 제사지내는 집이 20%도 안 되는 동네 실정에서 제사를 모시는 우리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눈으로 보기에는 푸짐하지만 당신들이 보시기에는 부족할 수도 있는 제사상이지만 많이 드시라면서 은혜에 감사드리는 절을 올렸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하여 저승의 모든분들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주시라고 맘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제사를 마친 후 가족들이 모여 앉아 생전의 부모님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후손들이 푸짐하게 제사상을 물려받아 포식하고는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밤에 먼 길을 떠나야 하고, 상차림을 주관하시느라고 수고하신 큰형수님도 빨리 쉬셔야 하는 상황인지라 본가에 와도 바로바로 가는 내가 앞장서서 빨리빨리 하고 가자 재촉하였다.
남은 음식을 세대별로 바리바리 싸주셨다.
대전 작은 집인 우리 몫은 내가 좋아하는 식혜, 느리미, 두부부침, 산적이었는데 조금만 가져간다고 하여도 자꾸자꾸 주시어 다 들어보니 제법 묵직했다.
밖에 나오니 고향의 겨울밤은 차가웠다.
애련한 맘보다는 빨리 가야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부모님 생시에도 오기만 하면 집으로 갈 생각부터 하던 버릇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제사를 모시면서도 그러는 것이 미안했는데 그런 것마저도 사랑스러워 빙그레 웃으시면서 어서 가라고 해주시던 부모님이셨다.
동구 밖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는 밤길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앞을 지나치면서 산소를 향하여 “아부지, 엄니! 저희들 가요. 다음에 또 올게요. 평안히 계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다.
데보라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승에서 잘 사시었으니 저승에서도 잘 사실 거예요. 자손들도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시지 말고 그 세계 분들과 함께 즐겁게 사에요” 라고 후렴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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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