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 이항복의 손, 감, 권율 장군 관계를 다시금 생각케 한다.
이항복(李恒福) 역사/군사/지리/인물 , 다음백과
소년 이항복의 지혜
선조와 광해군 때의 명신
이항복(李恒福)으 호는 백사(白沙) 명장 권율의 사위였다.
어렸을 때 항복은 권율 대감의 옆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항복의 집에는 큰 감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그 감나무 에서는 해마다 감이 주렁주렁 열리곤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감나무는 권 대감 집 담장 가까히 서 있었던 것이어서 가지의 대부분이 옆집 너머까지 뻗쳐 있었고, 이를 빙자하여(또 대감 집이라는 세도를 빙자하여) 옆집 하인들은 항복네 감을 다 따가다싶이 하고 있었다.
이를 안 어린 항복은 어떻게 대감네를 혼내줄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느날 대감이 집에 있는걸 확인하고 불쑥 대감댁을방문했다.
항복은 대뜸 대감이 머물고 있는 방안으로 팔을 쑥 밀어 넣었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 격으로 봉창을 뚫고 들어온 어린 아이의 팔을 보고 대감이 놀라지야 않았겠지만, 요것봐라 싶기는 했을 것이다.
항복이 방 밖에서 여쭈었다.
"대감 , 이 팔은 누구의 것이오니까?"
권 대감이 대답했다
" 이놈아, 그건 네놈의 팔이 아니냐?"
그러자 이 맹랑한 꼬마가 냉큼 받았다.
"그러하다면 담장을 넘어온 감은 또한 누구의 것이오니까?"
이에 대감이 껄껄 웃고 하인들을 불러서 감을 다 돌려주도록 하였음은 물론이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권율은 항복의 영특함을 알게 되어 마침내 딸을 항복에게 시집보냈던 것이다.
말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언제들어도 새로운 지혜와 재치가 느껴지는 이야기다
백사 이항복은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오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저작(著作)·박사·정언(正言)·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시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출처] 역사의 인물 - 이항복(李恒福)|작성자 화풍
http://www.facebook.com/kimjyyfb
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쉴 새 없이 지껄인다 (0) | 2020.12.07 |
---|---|
공맹 (0) | 2020.12.04 |
모자<정읍명장> (0) | 2020.11.26 |
하고싶은 말을......, (0) | 2020.11.22 |
원천차단 (0) | 2020.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