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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셋방살이

by Aphraates 2022. 6. 9.

미당 선생은 1990년대 중반에 집을 장만(張晩)했다.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현재까지 사는 이 향촌 아파트다.

많이 늦었다.

() 단계를 거쳐 자가(自家)가 된 것은 호적 나이로 43년만이었다.

온전한 자가도 아니었다.

십년 넘게 은행 대출금과 사채를 갚았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 다르니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고, 이렇게나마 집 한 칸 잡고 사는 것이 고맙지만 후회되는 그것도 있다.

 

당시는 내 집 마련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늦었을까.

물려받은 재산이 있거나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가족 친지한테 신경을 좀 쓰긴 했으니 기둥뿌리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궁색하지 않은 평범한 직장인이어서 맘만 먹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집 한 칸은 장만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못했을까.

 

창피한 무주택자로 굳게 자리 잡은 데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우선, 집에 대해서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다.

직원 복지 차원의 사택 제도가 좋았다.

공직 계통은 물론이고 사기업에서도 부러워할 정도였다.

애들 둘러업고 사정사정하여 이사하고서 주인 눈치를 살펴야 했던 그 당시 누구라도 했음 직한 셋방살이 서러움을 겪어보질 않았다.

다음은, 이재(理財)와 축적(蓄積) 의지와 기술이 없었다.

알뜰하게 저축하여 그 종잣돈을 기반으로 하여 부를 늘려가고, 갖가지로 제공되는 정부 지원과 금융 지원을 활용하고, 눈치 빠르게 귀동냥을 하고 발품을 팔아 부동산 투기 대열에 끼어들어 한 몫 챙길 능력이 부족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그에 합류하지 못한 것은 개인적인 성향이자 실수였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당시는 자기 집을 갖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통계를 보니 1980년대 중반 주택 보급률이 60%가 채 안 됐다.

국민 세대중 반은 자가이고 반은 세였다는 이야기다.

은행 문턱은 엄청 높았다.

서민들에게 대출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도 대출이 없으면 집 사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돈을 빌려야 했다.

연이자가 50%인 사채 장려 돈을 쓰기도 했다.

자료를 보니 1985년도 예금금리가 25%였다.

간신히 대출받아도 연 30% 내외의 이자 부담이 뒤따랐다.

지금 3%대의 대출금리도 높다고 야단인 것은 격세지감이다.

 

집 장만과 관련한 여러 가지를 볼 때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과거 세대는 언해피(Unhappy)이고, 현세대는 해피(Happy)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현세대가 느끼기에는 예전보다 훨씬 어렵고 불리하단다.

세태가 달라지고 살림살이 규모가 커지면서 또 다른 문제가 속출하고 있어 현행 제도나 흐름대로라면 영끌이 아니라 영영끌이라도 내 집 마련이 어렵다고 불만이다.

뭔가는 왜곡된 것이다.

그를 해소하고자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하면서 온 힘을 기울이고 있지만 앞서가는 사람들을 잡을 수는 없고, 뒤처진 사람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라며 질타를 당하고 또 당한다.

어느 정권이든 부동산 문제는 교육 문제와 함께 정답이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는데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하고 모든 힘을 다해도 나아지는 것이 안 보인다는 출산 문제와도 깊숙이 연계가 된 것이어서 배배 꼬인 꽈배기는 저라 가라인 것 같다.

 

그러나 풀어내야 한다.

첩첩산중이라도 가야 할 길은 가야 한다.

여우 피하려다가 호랑이 만나고. 구호만 외치다가 주저앉을지라도 최선이 아니면 차선의 답이라도 내야 한다.

문제 풀이에 다 함께 십시일반으로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며칠 전 514번을 타고 산내를 다녀오면서 재개발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선화동 성당 길을 지났다.

연이어서 서슬 시퍼렇던 5공이 끝나갈 무렵 청양전력소 개소가 되면서 함께 근무하게 된 강() 선배님이 거기에서 이사왔다면서 위치를 알려주고 그 뒤로 몇 번 가보고는 우리는 언제 저런 집을 가져보나 하고 부러워하던 민정이네 집 중촌동 저층 주공아파트 철거 중인지 대형 건물에 가려졌는지 못 본 것 같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그 시절에 선화동과 대흥동에 집을 갖는 것은 고사하고 셋방살이하기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도심공동화에 따라 외곽 아닌 외곽이 되었으니 집 주이었든 세를 살았든 감개무량할 텐데 그런 감수성이나 살아있는지도 불명확하다.

OOO 신부님과 수녀님 말씀을 들어보니 아직도 언제인지 가늠하기도 힘든 시절의 K 시장님네 할머니께서 좌장으로 계시다는데 한 번 만나 뵙고 싶다.

 

사모님 아니, 할머니.

K 시장님 시절입니다.

제가 박박머리로 책가방을 들고 하숙집-한밭상고(중앙고등학교)-대한극장-주정공장-대전여상 길을 걸어 시민관(동양백화점) 시내버스 승강장에서 문화동 버스를 타고 중앙로-대덕군청-도청-시청-충남기업사(보안대)-대흥동 차부(대림빌딩)-대고오거리-퇴미 고개-보급창(센트럴파크A)-충남대학교(문리대-본부-공대)의 비포장길을 달려 문화동 학교에 다니던 김() 아무개입니다.

 

선화동-문화동 학교길

 

주인집과 셋집 사람들이 이렇게 뒤죽박죽되어 상전과 하인 질서가 문란한데도 그렇게 자리를 지켜주시어 고맙긴 한데 옛날을 생각하시면 보람도 설움도 크시겠어요.

그러나 어째겠어요.

세월이 그런걸요.

다 잊어버리시고 중후한 인품의 사모님이 할머니가 되셨듯이 까까머리 학생도 산전수전 다 겪고 주름 가득한 얼굴로 그 거리를 지나고 있다는 것은 현실이니 잘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게 건강히 사셔야 합니다.

할머니, 지금도 있지만 시들하다는 선화동 뒷골목 벌집 식당에 가셔서 수육에 칼국수 한 그릇 하시지요.

그것으로 세월의 영욕을 깨끗이 하신다면 그 역시도 잘 사시는 한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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