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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이승복 기념관

by Aphraates 2022. 9. 11.

이승복 기념관.

몇 번 들린 적이 있다.

특별한 의미를 두고 가거나 정숙한 맘으로 추모를 하려고 일부러 찾은 것은 아니다.

영동고속도로, 동해안 국도(7), 인제 국도(44)를 타고 산자 수려한 강릉, 속초, 설악산, 평창 지역을 오가다가 들린 것이다.

 

처음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초라했다.

폐교(?)된 터에 이승복이라는 팻말 하나 서 있을 정도로 쓸쓸했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이름과 반공의 의미가 무색했다.

아버지 박() 대통령님이 계셨더라면 저렇게 방치하진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잊혀진 곳이었다.

그 뒤로 성역화가 이루어져 많은 발전을 했다.

기념관 홈피에 들어가 보니 정갈하게 다듬어졌고, 평창 교육지원청에서 관리하고 있어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다만 이승복이라는 인물을 정의하고 반공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 크게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수준이 아닌가 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그 말로 대변되는 이승복은 1959년생이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띠는 개띠로 길을 가다가 걸리는 사람은 개띠라고 하던 1958년생 다음 해 태생이다.

미당 선생보다 7년 아래(1959-1952=7).

용띠가 혈기 왕성할 때는 개띠를 한참 아래로 보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흐른 지금은 같이 늙어가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적지 않다.

 

충청도 용띠 소년은 당시 공주중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다.

강원도 개띠 어린이는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속사 국민학교 계방분교 2학년생이었다.

 

이승복은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다.

19681월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 즉, 1·21사태에 연이어 벌어진 삼척 울진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당시에 희생당했다.

참으로 아픈 역사다.

아직 끝나지 않고 지금도 또 다른 형태로 진행 중인 아픔이다.

당시는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이다.

그 어린 학생이 반공교육을 받은 것 이외는 공산주의가 뭔지 알거나 행한 것이 별로 없을 텐데 무참히 죽임을 당하였으니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그 말을 놓고도 나중에는 언론 매체 간에 진위 공방을 벌이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그나저나 이승복이 공식적으로 어떤 칭호를 받는지 모르겠다.

홈페이지나 어떤 자료를 찾아봐도 호칭이 없었다.

그냥 이승복이었다.

이승복 반공투사, 이승복 열사(의사), 이승복 어린이, 이승복 군, 이승복 후배......, 그리 부르는 것보다는 이승복이라고 하는 게 추측해보는데 호칭을 안 붙이든 무슨 호칭을 붙이든 간에 그 한마디의 말이 함축하는 바가 클 것이다.

 

다른 식으로 바꿔 써 본다.

기왕이면 나는 OOO이 좋아요라고 긍정적인 말을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

좋은 소리는 귀에 안 들어오고 나쁜 소리는 귀에 콕 박히는 것을 어쩔 수는 없는 것 같다.

OOO에 아래 말들을 넣고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결사적으로 싫어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콩도 먹어본 말이 잘 먹는다고 했다.

한 번 돌아선 경험이 있는 자는 언제 다시 다르게 돌아설지 모른다.

내내 잘 있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다.

그러고도 잘 산다.

응징받아 못 살아야 할 텐데 단련이 돼서 그런지 더 잘 사는 것 같다.

 

배신자, 변절자, 전향자, 반역자, 반항자, 역모자, 밀고자, 철새, 하이에나, 고무신 거꾸로 신은 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간 보기 하는 자, 약점 잡고 아픈 데 찌르는 자, 뒤통수치는 자 조강지처를 버린 자, 자기가 먹던 우물에 침 뱉는 자, 배은망덕한 자......,

그러나 착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고 했다.

언젠가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태어난 전쟁 세대이고, 반공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교육을 받고, 군사주의와 권위주의 체질로 되고,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에 충실하고, 조국 근대화와 개발에 헌신 봉사하고, 삼강오륜과 안정을 중시하는 보수 민주주의에 충성하고, 분란과 갈등을 조장하는 운동권을 기피하고, 가난한 농촌의 아들로 태어나 남 탓하거나 남의 것 탐하지 않고 근검절약하여 중산층의 기득권으로 변신하여 무탈하게 살았다.

 

지금은 아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안 좋은 방향으로 변질이 되어 못마땅한 것이 갈수록 많이 나타나 어떤 면에서는 기존을 부정하면서 응원과 격려를 접었다.

남북 분단의 또 하나의 아픔인 비전향 장기수들을 생각해본다.

양쪽에 생존 비전향 장기수들도 얼마 안 될 것 같은데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본받을 점도 많다.

뚜렷한 신념과 주관으로 모진 고통을 감내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적이니 정치나 다른 것으로 잣대를 들이대면 답이 안 나온다.

무슨 탄압과 불이익을 받을지라도 나는 나의 양심을 걸고 내가 태어나 자라고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있는 남()으로 갈 테니 보내달라며 목숨을 걸고 버틴다.

그런 것을 두고 지독한 부르주아네 독종의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덜된 인간들이나 무식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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