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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콩알만 한 것이

by Aphraates 2008. 7. 17.
 

손님도 그리 많지 않고, 차 엔진 소리 이외는 들리는 소리가 거의 없는 한적한 버스 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자 어디를 다녀오는지 피곤한 모습으로 뒤편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여자 아이가 신이 나서 재잘거리기 시작하였다.

오늘 그 네 남친 말이야 짱이더라, 어제 거기에서 먹은 스파게티 졸나게 맛있더라, 내일은 놀러가기로 했는데 뭘 입고 가야할지 모르겠다, 엄마 몰래 비싼 화장품 하나 샀는데 안 들키려고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다, 우리 알바해서 버는 돈아 모았다가 어학연수 갈 때 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렌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전화가 끊길 줄을 몰랐다.


그러니 자연히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전화 내용을 듣기 싫어도 들려오는 승객들은 대부분이 요즈음 아이들 극성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런대로 재미있어 하거나 귀엽게 봐주었다.

그러나 장에 갔다가 친구들을 만나 거나하게 취하여 앞 측에 앉아서 고개를 끄떡이며 졸던 초로의 남자가 참다가 폭발하였다.

취기와 함께 불타오르는 정의감에 사로 잡혔다.

예의를 모르는 저런 아이들은 응징해야 한다는 기사정신이 발동하였다.

아이를 바라보고 인상을 찌푸려 가며 큰 목소리로 “이 봐, 아가씨. 전화좀 조용하고 간단하게 하지” 라고 시비조로 훈계를 하였다.

아이가 깜짝 놀라서 전화를 끊고 나더니 가재미눈을 뜨고 그 전화 방해꾼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기가 승하여 애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시건방지게 구느니 어쩌니, 뼈골 빠지는 제들 애비 에미 생각은 조금아 하느니 어쩌니  하며 횡설수설하더니 심지어는 욕까지 하였다.

그런 일을 당해 본적이 없는 우리의 패기 넘치는 우리의 호프가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다면 그 것은 자기 역할에 소홀한 직무유기인지라 여차 하면 맞짱이라도 뛸 태세로 신발 끈을 동여매고 나섰다.

“아저씨 술을 드시려면 곤히 드세요. 내 전화기 갖고, 내 친구한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하는데 아저씨가 뭐 보태준 거 있으세요? 왜 남의 사생활에 간섭이예요?”

잘 못 했다고 고개 푹 수그리고 앉아 있을 줄 알았던 아이가 당돌하게 나오자 술이 확 깬 취객이 “아니, 이 콩알만 한 것이 기가 막히네. 잘못 했다고는 안 하고 뭐 잘했다고 고개 빳빳하게 세우고 야단이야? 아주 건방지고 가정교육이 안 됐구먼. 너는 네들 아빠 엄마한테도 그러고, 배운 게 고작 그거뿐이냐? 싸가지 없는 것 같으니라고”라며 방방 떴다.

한 번 붙어보려고 작심한 우리 용감무쌍한 호프가 다시 나서서 “아니, 세상천지에 그렇게 큰 콩이 어디 있다고 함부로 빗대어 말씀 하세요? 그러면 아저씨는 쭈그렁 쥐밤톨이세요? 아저씨는 집에 가시면 저 같은 딸이나 손녀도 있을 텐데 겨우 그 정도밖에 어른행세 하지 못 하세요? 남 걱정 하시지 말고 아저씨나 술 취해서 실수하시지 말고 잘 하세요. 어디서 사시는지 모르지만 참 걱정스런 집안이군요”하고 또박또박 말하며 대들었다.


그 뒤로도 차 안에서는 장청(壯靑)간에 고성이 번갈아 오갔다.

주먹을 불끈 쥐고 때린다커니 턱을 추켜올리고 때려보라커니 옥신각신하며 물리적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다른 승객들이 싸우는 그 노인네에 그 아이라며 조용히 가자며 짜증을 내는 바람에 싸움이 일단락되었다.

그 남자는 어디에서 내렸는지 모르겠고 그 아이가 먼저 집 앞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체면불구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엉엉 울어대어 마중 나갔던 언니가 동생의 맘을 달래주느라 혼이 났다.


담배 피운다고 꾸지람을 듣던 아이들이 훈계하던 노인을 집답폭행한 사건이 떠오르고, 쥐통만한 여학생들이 숨어서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세상 말세라고 한탄하는 것을 보고 그 정도는 양반이어서 마빡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와서 담배 한 대 빌리자고 하는데 내 마빡으로 피가 거꾸로 흐르더라고 열불 내던 사람이 떠오르고, 누구네 집 아이들이라도 그런 유혹에 넘어갈 수 있으니 내 아이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믿을 것이 아니라 눈여겨보고 흡연은 백해무익하고 입문하며 끊기 어려우니 아예 발을 들여 놓지 않도록 하라고 열변을 토하던 젊은 훈장도 떠올랐다.


콩알만 한 것이…….

콩알만 하다고 생각이 없고, 먹는 걸 안 먹는 것이 아니니 함부로 해서는 법질서가 무너진다.

또한 콩알만 한 일이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 안 지키면 역시 법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헌법수호, 준법정신, 만인평등, 법치주의 등등이 리마인드되는 제헌절(制憲節)날인데 어른이 어른스럽지 못 하고 아이가 아이답지 못한 차 안에서의 싸움 같이 콩알만 법이 되어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다.

법대로 해야 한다면서 좋은 말들은 골라서 잘 들 하기도 하고, 자기들 잇속만 채우는 거 같아도 법의 정신에 부담스러워 하기도 하지만 법과 규범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서 오히려 법대로 하면 되는 일이 없다는 오류도 발생하고 있으니 제헌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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