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는 향촌(鄕村) 아파트가 준공되어 신규로 입주한 것이 90년 대 중반 봄이었다.
그러니까 십 년 하고도 삼 년이 훌쩍 넘었다.
그 동안 아파트 주변의 환경에 변화가 많았다.
외적으로는 허허 벌판이던 주변이 대전의 도심지 중심으로 변모하였고, 내적으로는 외벽 도장 공사를 몇 차례인가 하면서 이사 가고 이사 온 사람들도 많아 집 주인과 세입자가 바뀌었다.
그런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연륜을 더해 가듯이 아파트가 노숙미와 인기가 있어 세월의 변화로 시들해지는 것이 아니라 둔산 지구의 늙은 막내 아파트로서 윤기를 더 해 가고 있다.
그런데 별로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주민들의 맏형과 막내가 그대로인 것이다.
맏형이나 막내나 나이는 함께 열 살 넘게 먹고 같이 늙었지만 처음에 매김한 자리는 변하지 않고 굳건한 채로 그대로이다.
아파트 생활하면서 만나는 사람은 주로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에는 통로 모임이나 반상회 같은 모임이 제법 있었지만 그런 모임의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되어 일반 주민과 어울릴 기회는 별로 없이 마주치면 인사만 하는 정도다.
지금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은 한정적인 숫자의 성당 교우들이 대부분이다.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어울리다 보니 맏형과 막내의 자리가 더욱더 고착화되다시피 한 것 같다.
그 십 수 년의 세월 동안에 맏형과 막내도 자신들 내적으로는 많은 위상 변화가 있었다.
맏형은 사십대의 장년에서 육십 대의 노년이 되어 자식들은 출가하여 손자 손녀가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막내는 삼십대의 청년에서 오십대의 초로가 되어 간다.
그런데도 사람 가뭄은 여전하여 맏형한테 나이 더 든 노인 선배는 거의 없고, 막내한테 나이 더 젊은 청년은 후배가 별로 없을 정도로 인적 순환이 안 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십수 년 전의 고참이 지금도 고참이고, 그 때의 졸병이 아직도 졸병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에서 가장 기분 좋은 것은 졸병과 연관되어 있다.
그게 무엇일까?
계급장 없는 훈련병에서 계급장을 달고 자대 배치를 받는 것?
작대기 두 개의 일병에서 세 개의 상병으로 진급한 것?
애인이 고무신 거꾸로 안 신고 종종 면회 오는 것?
피엑스 대금이 오버되어 걱정하고 있는데 마침 돈을 보내오는 것?
일종 창고에 사역 나갔다가 별 사탕이 든 건빵을 받는 것?
담배가 떨어져 심난한데 안 피우는 동료가 슬며시 한 갑 전해주는 것?
사제 밥과 술과 과자를 질리도록 먹는 것?
새 속옷과 새 군복과 새 구두를 지급받는 것?
사격이나 구보에서 우승한 것?
유격이나 고된 훈련에서 열외된 것?
악명 높은 고참병이 장교로부터 얻어맞으며 혼나는 장면을 훔쳐보는 것?
통제가 느슨한 곳으로 파견을 나가거나 편한 자리에서 근무하는 것?
별 세 개인 외삼촌이 부대장의 안내를 받으며 나를 찾아 온 것?
적들과 한 번 붙을 상황이었는데 슬며시 비상해제가 되는 것?
휴가나 외출을 나가는 것?
귀대가 늦어져 탈영범으로 몰릴 판에 우연히 만난 헌병이 선처해주는 것?
제대 명령서를 받아 들고 나갈 준비를 하는 것?
군인으로서는 위에 열거한 것들이 다 기분 좋은 일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기분 좋은 것은 내 밑의 졸병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참기 어려운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고난의 졸병 시절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은 세월이 가면 단계별로 줄줄이 이어 들어오는 졸병들인 것이다.
내 밑의 졸병들은 나의 희망이고, 졸병들을 거느리며 맘에 안 들면 “내 밑으로 전원 집합!” 하고 호령하는 것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그런데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군대에서고, 일반 사회에서고, 아파트에서고 그런 묘미가 없다.
아무리 개인 생활을 하는 아파트라고 할지라도 군대의 그런 예전 룰이 어느 정도는 통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여 재미가 없다.
물론 그런 재미없는 것이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십수 년 전에 물병을 들고 다니며 심부름하던 사람이 그 신세를 면하지 못 하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지금도 같은 신세로 맏형은 영원한 맏형이자 막내는 영원한 막내라면 맏형은 몰라도 막내 입장에서는 조금 기분이 좋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 현상은 성당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이 늙어 가면서 새파랗게 어린 사람 행세를 해야 하는 늙은 막내 아우님들은 좀 서럽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늙은 맏형 형님들은 좀 미안하다.
또한 직장에서도 그렇다.
연공서열이 파괴된 직장에서 늙은 맏형이 어디 있고 늙은 막내가 어디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인데 직위만 갖고 따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니 어렵다.
몇 년 만에 가뭄에 콩 나듯이 들어오는 신입사원이 다른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한 경험이 있는 한 물 간 얼굴의 중년이라면 언제 막내를 면할지 모르는 늙은 막내로서는 짜증나는 일이다.
그렇다고 만년 졸병인 늙은 막내라고 해서 서러워 할 것은 없다.
막내도 막내 하기 나름이고, 만년이 영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나마 함부로 했다가는 나 막내 안 하겠다고 퉁셍이 부리면 낭패이고, 막내라고 해서 인격 모독을 당할 정로 부족하지는 않기 때문에 무시당하거나 괄시 당할 염려는 거의 없다.
대신 늙은 막내로서 투정을 하고 귀여움과 대우를 받는 재미도 솔 솔하고, 여기서는 늙은 막내이지만 저기 가서는 늙은 맏형으로 무게를 잡을 수도 있다.
늙은 맏형 : 어이, OO이 아빠. 이 것 좀 하게나. 이런 일을 할 군번은 벌써 지났지만 밑의 쫄 들이 없으니 어쩌겠어? 내가 대신할 수도 없으니 세상사는 게 다 그러리니 하고 즐거운 맘으로 하게나. 나중에 복 받을 거야.
늙은 막내 : 이게 몇 년 째 이러는 거야? 졸 들은 없고 늙은 막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형님들 나이에 졸병 면하면 뭘 해요? 그렇다고 나는 모른다고 만세 부를 수도 없고 비운의 세대이군요. 형님들도 같이 늙어가면서 너무 그러지 마시십시다.
늙은 맏형 : 노여워 말게나. 다 때가 있는 것이고, 고생하다 보면 그 때도 오는 거야. 운대가 맞지 않는다고 체념 해. 그리고 같이 놀려고 하지 말고 늙은 막내로서의 권리와 의무나 다 하도록 해.
늙은 막내 : 알았어요. 어디 가서 졸병들을 한 차 수입이라도 해 오던지 해야지 이거 정말 자세 안 나오네.
늙은 맏형과 늙은 막내는 “늙은” 성을 가진 씨족 종친의 같은 처지인지라 잘 안 맞고 튈 거 같은데도 큰 잡음 없이 맞아 돌아가는 것을 보면 늙은 맏형과 늙은 막내도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면도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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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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