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나 기업에서 돈을 쓰는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돈 셈은 부자지간에도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말처럼 돈 관계는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다른 것에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 정서상 공은 공이고 사는 사요, 아버지 것은 아버지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라고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서민이라고 하면 좀 그렇고, 중산층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 주변사람들의 가계 운용 형태를 보면 몇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밖의 사람은 돈 버는 일만 하고 쓰는 것은 안의 사람이 맡는 공처(恐妻), 엄처(嚴妻), 애처(愛妻) 시하(侍下) 형이다.
월급봉투를 고스란히 받치거나, 땡 전 하나 못 만져보고 에누리 없이 온라인으로 안 사람의 통장으로 자동 입금되고 그에 대해서는 일체 노터치다.
밖의 사람은 한 달에 일정 금액의 용돈도 받아서 써야 하고, 헛되게 용돈을 다 쓰게 되면 십 리는 되는 출퇴근길을 걷는다던가 퇴근 후에 집안 청소를 하는 아르바이트라도 해야지 함부로 모라트륨을 선언할 수도 없다.
그런 집은 대개가 전형적이고 안정적인 건실한 봉급생활자 가족이다.
재산 상속 같은 여유 돈 없이 빠듯하지만 안의 사람이 지독하고 짜임새 있이 알뜰히 꾸려 가기 때문에 그 돈으로 아이들하고 가정을 꾸려 나간다.
만약에 밖이나 안에서 조금만 방심하거나 삐끗했다가는 땡! 이다.
둘째, 밖의 사람이 자기가 번 돈을 움켜지고 이왈저왈 다 하고 안의 사람은 생활비를 정기적 또는 수시로 받아서 쓰는 남자지존(男子至尊) 형이다.
이런 집은 남자가 따지기는 좋아하되 남을 믿지 못 하는 꽁생원이거나 여자가 능수능란한 수법으로 남자를 넘겨 먹으며 딴 주머니를 찰 확률이 많은 걱정 없는 자유방임형이어서 조금은 거칠고 불안한 집안이다.
셋째, 밖의 사람이 번 돈을 한 통장에 넣어 놓고 내외(內外)가 필요시마다 빼 쓰는 형태로서 좋게 말하면 주도권을 양보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주도권을 빼앗겨 돈에 대한 주도권 개념이 희박한 상호의존(相互依存) 형 내지는 절충무관심(折衝無關心) 형이다.
이런 집은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던가 마음 적으로 편안한 집이라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집에서도 그게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피차가 돈을 적재적소에 잘 쓰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돈을 쓰게 될 때는 상의가 필요하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야 한다.
한 마디로 주머니 돈이 쌈지 돈이라는 말이 별 탈 없이 통하는 집이다.
그 세 형태 중에서 어떤 것이 제일일까?
사람과 집에 따라 다 다르니 단편적이고 일괄적으로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형태가 정해지는 것은 그 사람과 집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것이지 임의적으로 내가 그러고 싶다고 해서 된다거나 내가 싫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굳이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 선택해보라고 한다면 주머니 돈과 쌈지 돈이 구별 안 되는 셋째다.
첫째 엄처시하의 경우는 밖의 사람이 좀 처량하다.
시계바늘처럼 정확하게 살면서 밖에서 번 돈을 고스란히 안에 갖다 주고는 권한과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은 힘이 빠진다.
둘째 남자지존형 경우는 밖의 사람이나 안의 사람이나 딴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하여 서운하다.
밖에서 번 돈을 온전히 건네는 것이 아니라 편법을 사용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안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돈을 빼 내서 쌈지에 넣어 차고 다닌다면 피차가 피곤하다.
그런 집은 대개가 주머니와 쌈지가 별개인 것도 문제가 된다.
밖의 사람 주머니가 텅텅 비었는데도 안의 사람은 쌈지가 불룩하면서도 나 몰라라 하고, 안이 사람 쌈지에 먼지만 쌓이고 곰팡이 나게 생겼는데도 밖의 사람 두둑한 주머니가 외면하여 주머니 돈이 쌈지 돈이라는 말을 우습게 여긴다면 탈이 난다.
별다른 문제가 없을 때야 그런대로 지나가겠지만 문제가 있을 때는 무촌전쟁(無寸戰爭)이 벌어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그렇게 가정에서는 주머니 돈이 쌈지 돈 식으로 운용되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사회에서는 다르다.
회사나 기관 같은 조직의 돈은 분명히 공금이다.
따라서 회사의 전 지분을 갖고 있는 오너이거나 사용 결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장(長)이라 할지라도 법과 규정에 따라 돈을 써야 한다.
그런데 주머니 돈이 쌈지 돈이라며 주먹구구식으로 운용이 된다면 문제인데 그런 관행이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종종 그를 묵인하는 측과 문제 제기를 하는 측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데보라가 지난봄에 이상한 부탁을 하나 했었다.
부부지간에 정도 좋고, 가정이 화목한 집의 여자들도 어지간하면 비자금 통장 하나 정도는 다 갖고 있더라면서 우리는 그럴 필요는 없지만 기분학상으로 안 그러니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가 마침 본인 명의의 통장이 필요하던 차라 선심을 쓰며 통장을 하나 만들어 얼마간의 돈을 넣었다.
그리고 통장, 도장, 현금직불 카드를 건네줬더니 서랍의 통장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그런데 반년이 지나도록 그 통장을 잊고 있다가 해외여행 시에 남았던 달러를 정리하면서 통장을 발견하고는 확인을 해 봤더니 만들 때 그대로였다.
통장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니 왜 사용실적이 없느냐고 하였더니 자기 지갑에서 내 명의의 카드를 꺼내 보이며 이 거 하나면 만사통과인데 뭐 번잡스럽게 다른 걸 쓰느냐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통장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 보여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지 내가 그게 뭘 필요하겠느냐며 언제 기회가 되면 없애던지 해달라고 하여 나도 힘도 안 들이고 “그러지 뭐” 라고 대답했다.
지인이 가을 호반 문학회에 왜 안 왔느냐며 무슨 일이 있느냐고 안부 인사차 전화를 했다.
문단 활동에 흥미도 시들해지고, 단풍도 아직 멀었는데 무슨 가을 문학회냐고 하면서 실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라 먹고 사는데 여러 가지로 어렵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 가지 못 했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것도 아니고 자기 같이 세월이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면서 힘들게 사는 사람을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뭐냐며 금방이라도 쳐 들어올 태세였다.
그러면서 조금 감춰뒀던 돈을 차 사는데 보태느라고 홀딱 써 버렸더니 낙이 없다며 아무도 모르게 다만 얼마라도 적금을 들던지 해야지 안 되겠다고 하였다.
여유 있는 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돈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는 것이 우스워서 주머니 돈 이야기를 했다.
“비자금이 필요하세요? 손바닥만한 팬티에 주머니 만들어 차고 다니게요? 그래봐야 나중에 다 남이 갖다 쓰게 돼 있으니 괜한 고생하지 말고 되는 대로 하세요. 하기사 우리 어머니를 보니까 돈이 위안은 되더라고요. 우리 어머니는 돈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쓸 줄도 모르셨어요. 그렇지만 누가 돈을 좀 드리면 수건에 꼭꼭 싸서 웬만한 애가 하나는 들어갈 만할 정도로 크게 만든 꼬쟁이 주머니에 넣고 옷핀 몇 개를 채우셨어요. 그리고는 딸이나 손자손녀들한테는 어림도 없이 아들들한테만 나눠주곤 하셨는데 이제는 연로하시어 그런 낙도 모르시더라고요. 그런 어머니를 보는 자식으로서 안타깝기도 하고, 돈을 주머니에 차고 다니실 때 도 많은 돈을 채워드렸을걸 하는 후회가 되기도 해요. 그러니 작가님도 어디에 주머니를 만들어 차고 다니든 하고 싶을 때 하시구려. 나중에 그 주머니 풀 때 술 한 잔 사주시면 좋고요” 라고 했다.
내 얘기를 조용히 들은 그 작가는 공감이 가는 어머님이라고 숙연해 하면서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그런 욕심은 아니고, 빈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해서 해 본 소리라고 하였다.
주머니 돈이던 쌈지 돈이던 풍족하다면야 돈이 어디에 들어 있던 신경 쓸 일이 없겠지만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이 돈이고 보면 어디에 들어가 있게 해야 좋을 것인지 신경을 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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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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