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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명의(名醫)라면

by Aphraates 2008. 10. 21.

조선중기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했던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許浚) 선생님은 당대의 명의였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90년대 말 텔레비전 인기 드라마에 등장했던 연인 예진 아씨는 실존 인물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도 극중 미화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였다.

허준 선생님이 명의라고 칭호를 받았을 때는 그만한 의술에 그만한 사랑을 실천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때에도 경험적 의술을 바탕으로 의도를 확립하여 오늘날 까지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는 BC(기원전) 460년 경 그리이스의 철학자이자 의학자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의인으로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을 실천하여 의사의 사표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에 뛰어난 의술이 있는데도 그를 병 예방과 치료에 사용하지 않았거나 의술이 미천하면서도 우연히 난치병을 몇 차례 치유한 종도였다면 돌팔이 의인이나 떠돌이 약장수라고 까지는 무시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명의라고 부르기 까지는 안 했을 것이다.


명의면 명의답게 생각하고 처신해야지 안 그러면 명의라고 할 수 없다.

만약에 허준 선생님과 그 일행이 이렇게 타락했다면......,


연이은 전쟁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나라에 이름 모를 역병이 돌았다.

기아에 허덕이던 백성들은 병에 대한 저항력이 급속히 약해져 쓰러졌다.

고을고을에서는 사람들이 약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 하고, 의원한테 진 찰 한 번 못 받아보고 죽어 나갔다.

민심이 흉흉했다.

얼떨결에 부모형제를 여의고 예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상을 치룬 백성들은 물론이고 나라님을 비롯한 만조백관들도 가혹한 천형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다는 격으로 거대한 태풍이 나라를 향하여 올라오고 있어 온 나라가 공포에 휩싸였다.

태평성대는 한낮 남가일몽이었고, 살아있는 오늘이 살아야 할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한없는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침저녁이면 모람모락 피어오르던 집마다의 굴뚝은 멎어서 냉기가 돌고, 철시한 시전거리는 오가는 사람 없이 죽음의 거리처럼 음산하고, 관아에는 기족 잃은 포졸이 창을 비스듬히 들고 주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였을까?

가만히 앉아서 “날 잡아 잡슈” 하고 당할 나라와 백성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역경을 딛고 버티어 왔고, 그 보다 몇 배 험한 꼴을 당한다 해도 이겨낼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다.

건드리면 튀는 근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난국극복을 위한 비상총력체제로 전환하였다.


먼저 석고대죄 하는 심정으로 통회하였다.


다음은 어린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아픔을 함께 하고자 추상같은 임금의 칙령이 발표되었다.

조정 행사에서는 일체의 음주가무를 금한다, 수라상에는 세 가지 이상 찬을 올리지 말 것이며 모든 관리들은 하루 한 끼 이상을 금식 또는 절식을 한다, 혼란기를 틈타 매점매석하는 등 경제를 문란케 하거나 백성을 불안케 하는 행위는 나라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역모로 간주하여 최고형으로 다스린다 등등......,

이렇게 기강확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고 이어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최소한으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만 남기고 왕실과 국가의 곳간을 풀어 고통 받는 백성에게 나누어 준다, 세금을 탕감하고 군역을 일시 중지한다, 나라에서는 불어 닥친 태풍 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고 태풍이 지난 후도 상정하여 후속 대책에 소홀함이 없으니 백성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에 대범하게 대응하도록 하라, 같은 처지의 이웃 나라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공조 및 협조토록 하라, 모든 관리들과 지도층 인사들은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솔선수범하라......,

이렇게 국난극복을 위한 희생적이고 의욕적인 일들을 추진하였다.


그 다음은 역병 퇴치에 돌입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의인(醫人)과 의녀(醫女)들이 풀가동된 것은 물론이고 사신과 유학생으로 해외에 나가 있던 의인과 의녀들까지도 속속 들어왔고, 비축된 의약품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많은 의약품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장가동과 수입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역병은 강한 놈이었다.

잡히듯이 잠잠했다가 나타나고 창궐했다가 수그러들고 하며 극성을 부려 온 나라와 백성을 괴롭혔다.

버티어 내던 백성들도 기력이 소진되고 시들시들해져 이제는 세월이 약이라는 것을 기대하는 약한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역병 때문에 온 나라가 지리멸렬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우리의 호프 허 생원과 그 일행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최고의 명의 그룹인 그들이 팔 걷어붙이고 살신성인의 정신으로만 나와 줘도 역병을 퇴치하는데 의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도움이 될 텐데 통 보이질 않았다.

왜 그렇게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인지 사람을 풀어 수소문해봤더니 이게 웬 일인가?

아뿔싸! 그들이 저기 주막에 있었네.

명의이기를 포기한 채 주색잡기에 빠져 나라와 백성의 고통 같은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밤낮으로 한량들과 볏섬 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를 보다 못한 그 집 하인들, 다른 집 하인들, 지나가는 하인들, 멀리 있는 하인들이 병들어 골골하는 몸을 이끌고 모여서 들고 일어났다.

볏섬 놀이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고, 명의로서 마땅히 병든 백성들을 고쳐주며 그들과 아픔을 같이 해야 한다고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명의이되 명의 행세는 하지 않은 채 엉뚱한 논리를 들이대면서 볏섬 놀이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 그 놀이를 안 하면 더 이상 할 기회가 없을 거 같다는 급박한 생각에 식음을 전폐하면서 놀이에 몰입하고 있다.


이번에는 허 생원의 상전인 판서 대감이 나섰다.

등을 두드리고 달래면서 이럴 때 명의의 진가를 발휘하여 백성들을 고쳐주는 것이 나라님 성은에 보답하는 것이라며 거들었다.

허나 허 생원은 서출이라고 무시나 했지 나라님이 해 준 것이 뭐 있느냐고 비웃고는 내가 나서서 역병이 물러설 것이 아니라며 술 취한 눈을 껌벅거리다가 고꾸라졌다.

그런 허 생원한테 백날 얘기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한 하인들이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 예진과 그 일행을 찾아가 정말로 이래서는 안 된다며 나서 줄 것을 하소연했다.

그러나 이미 맛이 간 그들은 한 술 더 떠서 아무 말 안 하고 그대로 두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며 모른 체하였다.


허 생원 일행은 변했다.

다른 단 맛에 익숙해져 자기들 본연의 일인 병자를 돌볼 생각이 없다.

병자들 세상에 대해서 아는 바도 없다 하고, 알았다 해도 그 거는 네들 문제니 네들이 알아서 하라고 그냥 지나친다.


병자를 돌보고, 죽어 가는 사람을 고치며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의인들이 자기들이 할 일을 안 하면서 다른 맛이 길들여져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정신 번쩍 들게 일격의 철퇴를 가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속이 후련하겠지만 그게 불법이고, 주먹으로도 불가능하다면서?

그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속이 터지지만 강하게 나가지 못하고 양심과 양식에 호소하면서 살살 달래는 것이라면서?

평안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할 수 없다는 데 송아지 목 매 끌고 가듯이 할 수도 없고, 내가 언제 몸이 아파서 그를 찾아가 아쉬운 소리 할지도 모르니 그럴 수도 없어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하며 세상 참 엿 같다는 말만 뇌아리고 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병자와 병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단 맛을 통하여 안정을 되찾고자 하는 고도의 병 치료방법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점잖은 체면에 악담할 수도 없고, 맞서서 그래봐야 똑같은 사람만 되니 답답하기만 한데 그래도 “에이, 제들만 아는 상종도 못할 몹쓸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런 인간들은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어째서 독버섯처럼 잘도 크는 것인지 모르겠어!” 라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는 데는 어찌할 수가 없다.


본의 아니게 명의 허준 선생님의 명예에 누를 끼친 비유법을 썼다.

허나 당신께서 그렇게 올곧은 의인정신을 갖고 헌신적으로 의술을 펼치고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에 후대에도 명의로 이어져 오는 것이지 당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쾌락에 빠졌더라면 후세 사람들이 이름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계기에 비유를 들어 그 숭고한 당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빛내고 싶었고, 행여나 이런 것에 찔리는 타락한 주막 인생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반성하고 자숙하며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당신의 이름을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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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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