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행군 훈련이 있었다.
대개는 한 일 주일 정도 시행하는데 훈련 방법은 부대마다 달랐다.
벗어나서는 안 되는 위수지역이 있는 지역 부대에서는 일정 지역을 가운데 놓고서 그 주변을 삥삥 도는 형태로서 계룡산을 가운데에 놓고서 논산에서 출발하여 공주와 조치원과 금산을 거쳐 되돌아가고 모자라면 반대로 한 바퀴 더 도는 식이었다.
반면에 위수 지역이 전국적인 특수부대에서는 일정 지점을 정해 놓고 다녀오는 형태로서 지리산을 목표로 하여 김포에서 출발하여 경기도와 충청도와 전라도를 거쳐 지리산 정상을 접수하고 나서 경상도와 강원도와 서울을 거쳐 되돌아가는 식이었다.
행군을 할 때는 개인별 생활용품을 일절 다 갖고 가야하고, 거기에다가 무기와 공동 물품도 나누어서 갖고 가야하기 때문에 그 짐을 지고 나면 몸이 착 가라앉을 정도로 무겁다.
그 모습은 마치 빈 차에다가 짐을 실으면 밑으로 쑥 내려앉는 것과 같다.
빈 몸으로 행군을 해도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한 짐 지고 몇 날 몇 일간에 걸쳐 밤낮으로 걷는 행군을 하는 것은 강인한 체력은 물론이고 투철한 군이 정신이 수반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훈련을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 그 시절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낸 것 같다.
아니다, 묵직한 등짐을 메고 비몽사몽으로 강행군을 하면서도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했다.
짐이 무거운 것은 무거운 것이었고, 무엇인가 하고 싶은 욕망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도로는 대부분이 비포장이어서 행군을 하다 보면 사람 꼴이 말씀이 아니었다.
새�만 얼굴에 먼지까지 뿌옇게 뒤집어쓰고 그를 털 생각조차도 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걸어가는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헌데 그런 강행군을 하면서도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하여 부대 영내에서 느끼지 못하던 재미있는 면도 많았다.
가장 좋은 것은 지나가는 여자를 보는 것과 뭘 조달해서 먹는 것이었다.
행군을 하다 보면 대열 옆으로 여자들이 지나갈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군인의 눈이 아닌 사회인의 눈으로 보면 눈에 차지 않을 수준의 여자들이었다.
헌데 선머슴같이 생겨서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정도인데도 왜 그렇게도 예뻐 보이는지 여자 구경 생전 처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무거운 등짐을 지고 간다 해도 이성에 대한 호감 때문에 그 여자들을 향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는데 그 여자들 입장에서 볼 때는 새까맣고 볼품없는 졸병들한테 네들도 남자냐 하고 웃었을 것이다.
부대원들은 행군훈련을 떠나기 전에 특별 정신 교육을 받았다.
교육의 주요 내용은 훈련방법과 안전 주의 사항 그리고,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행군을 하다 보면 민가에 들어가 뭘 달라고 한다거나 농작물에 손을 대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 틈새를 이용하여 지역 아가씨와의 애정행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민폐를 끼치면 가차 없이 훈련을 중단시키고 영창에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교육이 아니더라도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새벽부터 잠잘 때까지 밥 먹는 잠깐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머리 박고 있어서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오면 남아나는 머리가 없을 정도로 지독하다는 자대 영창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먹는 것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어서 길가의 밭에 몰래 들어가 무를 하나 쑥 뽑아서 상관들 안 볼 때 한 입씩 베어 먹는가 하면 인가에 순식간에 들어가 고추장좀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었고, 막간의 자유시간에 인근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아가씨와 니나노를 부르느라고 부대를 발칵 뒤집어 놓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강행군을 하면서 행군하는 병사의 임무도, 이성을 향한 청춘의 발산도, 한참 먹을 때 배고픈 민생고도 다 해결하여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것을 군기가 빠져서 그렇다고 제재를 할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인간의 본능이어서 이성을 주장하고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없어질 일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11월 첫째 날과 둘째 날에 군대시절에 버금가는 강행군이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원지에 있는 남쪽과 북쪽의 산으로 산행을 하였는데 햇볕에 그을려 눈만 반짝이는 군대 시절의 졸병 때나 한 세대의 세월이 지난 지금이나 강행군하면서 볼 거는 다 보고 할 거는 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어려운 판국에 한가하게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무슨 단풍놀이를 다니니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냐 없는 사람들이냐 하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것은 없다.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짓눌려 있을 것도 아니어서 그를 이겨내기 위한 마음과 준비를 새롭게 하여 분위기를 쇄신해야 할 필요성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또한 정해진 일정의 공식 행사였고, 산행을 통한 극기 체험의 기회였고, 검소한 여행을 하는 시범의 장이기도 하여 어려움을 이기는데 일조하면 했지 마이너스 요인은 없었을 뿐 아니라 이불 뒤집어쓰고 궁상떠는 것 보다는 백번 나은 것이었으니 강행군하면서도 볼 것은 다 보고 할 것은 다 했다는 느낌이었다.
첫째 날은 경상도 중동부 해안 인접지역에 있는 회사 산악회에서의 주왕산 산행이었다.
이 산행에서는 심신을 단련시키며 불굴의 의지로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절로 이는 것 같았다.
그 산이 있는 지역은 경상도 중에서도 오지(奧地)다.
산과 들은 개발이 부진해 보였고, 민가는 지붕개량만 한 초라한 집들이 많았다.
그러나 잘 뚫린 도로에 무슨 가을의 붉은 꽃밭처럼 펼쳐진 사과 과수원이 대단했고, 특산품인 사과(대구 능금→청송 사과)로 인하여 경제적인 활력이 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단풍은 가뭄 때문인지 감동적이지 못 하였지만 주차장에서부터 대전사 입구까지 즐비하게 서 있는 기념품/특산품 가게와 식당에서는 푸짐한 음식과 사과가 둥둥 떠 있는 동동주와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보니 어렵다는 경제가 기지개하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둘째 날은 서해안 중서부 지역에 있는 동문 부부모임에서의 오서산 산행이었다.
이 산행에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 나누고 의지하면 어려움보다 훨씬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예년보다는 여행객이 적었지만 산상의 억새 숲과 함께 하기 위하여 알뜰 여행을 온 동호인, 가족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야영장에서 끓이고 삶고 하여 나누며 오붓하게 정을 나누는 모습에서 사람 사는 맛을 느꼈는가 하면 실비로 싱싱한 생선회와 별미의 간재 맛을 보기위하여 주차장에 공간이 없을 정도로 북적이는 오찬 바닷가를 보면서 어려워도 경쟁력 있는 것은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산을 잘 탈 것처럼 멀쩡하다.
그러나 영 아니올씨다 이다.
창백한 얼굴에 땀을 비 오듯이 하며 엉금엉금 기어가면서도 사람들을 눈여겨봤다.
겉보기에는 금세 쓰러질 것 같은 병조가리인데도 가뿐하게 오르는 여자도 보았고, 정장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술에 잔뜩 취해서 정상에서 또 술을 마시는 도저히 산에 오를 거 같지 않은 체구가 커다란 초로의 남자도 보았고, 값나가는 등산복 정장에 예쁜 배낭을 메고 주차장에서 왔다 갔다 하며 산행에서 내려오는 일행들을 기다리는 곱상한 중년의 여자도 보았으니 볼 것은 다 본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씻을 것도 없이 베어 물은 청송 사과의 감미로움과 소맥 한 잔에 볼테기가 메지라고 먹은 오천 간재미의 신선함을 맛보면서 할 것은 다 했다는 만족감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매번 산행을 하고 나면 각성하는 일이다.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 핑계대지 말고 건강관리에 신경 쓰며 몸을 아껴야겠다는 반성도 하였으니 그만 하면 강행군하면서도 볼 거는 다 보고 얻을 것은 다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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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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