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저지와(井底之蛙) 즉, 우물 안의 개구리인가.
부채도사한테 물어본다.
대답이 명확치 않다.
그렇다.
아니다.
가톨릭 평화방송의 새벽 4시 “한국 순교자 전” 프로에서 노(老) 교수님께서 우리 고향 옆 동네 정산(定山)의 이도기(바오로) 순교자에 대해 강론을 하시고 계신다.
성지인 정산 면사무소 자리의 관헌과 해남 약국 자리의 순교지와 김(金) 베드로 신부님께서 다듬어 놓으신 현재 축협 자리 옆의 자그마한 정산 성지 사진과 함께 순교자의 신앙과 삶을 이야기하시는데 귀가 번쩍 띠고 눈이 반들거렸다.
개인 성향이 그렇기도 하지만 태어난 자신의 근본인 조상님과 부모·형제 그리고, 고향(고국)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생길과도 무관치 않은 것이 아닌가 한다.
언뜻 고향과 타향이 떠올랐다.
태어나면서부터 죽 고향 칠갑산 자락 미당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볼 때는 백 리도 더 떨어진 한밭(대전)에 정착한 마당 선생도 객지에 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같은 충청도 정도는 타향이라 말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하여 태어나고 자란 청양을 떠나 공주-대전-서울을 거쳐 온 것이 1966년부터이니까 정확히 계산하면 2022-1966=56으로 반세기를 넘어 환갑 나이가 다 돼 간다.
그래서 귀향이니 귀촌이니 하는 말이 나오면 미당 선생은 원적지 고향인 미당을 떠나 인근 고향인 대전에 살고 있어 본향(本鄕)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아 여기 대전에서 그냥 살겠다면 정당하기도 하고 부당하기도 한 주장을 하여 이율배반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를 고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인연은 인간 근본의 중요한 문제다.
그를 놓고 논하거나 흥정하면 천박하다.
인연은 소중하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의 굴레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귀인과 천인의 문제가 아니다.
미남(녀)과 추남(녀)의 문제가 아니다.
유식자와 무식자의 문제가 아니다.
부자와 빈자의 문제가 아니다.
착하고 선한 문제가 아니다.
그냥 좋은 것이다.
그리워하고, 만나고, 함께 하는 것으로 그만인 사랑이다.
거기에 다른 것을 아무리 가미한다 해도 그 본래의 맛을 더하고 덜하여 변화시킬 수 없는 진미(眞味)이다.
아이들의 혀가 굳어지기 전에 외국으로 나가야겠다고 한다는 대자대녀(代子代女) 근황을 이야기 듣고는 시무룩했다.
그런 남다르고 어려운 결정을 한 데는 머리가 티고 앞서가는 아이들의 결정이니 존중해야 한다면서도 뭔가 잃어버린 듯 서운한 맘이다.
여러 가지로 걸리는 장애까지 감수하면서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고 걱정을 하면 우물 안의 개구리 격인 대부대모(代父代母)라고 역으로 걱정을 할지도 모르지만 걸어온 길과 나가야 할 길이 다른 것을 어떤 결정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든 서로가 맞는 것이긴 하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흔들리는 갈대에 연약한 우리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몇 달을 체류해도 부족하다는 듯이 동분서주하는 아메리카 박인 것 같다.
오빠와 싸우다가 홧김에 여군(女軍)이 됐다가 휴가 나와서는 귀대하지 않고 탈영하는 일까지 스스럼없이 했다는 “꽃반지 끼고‘의 가수 제주도 은희 가수가 떠올랐다.
요즈음이야 전문 직업 여군도 많지만 미당 선생 세대인 그 당시만 해도 여군은 신기한 존재였고, 탈영은 엄중한 처벌감인데 일순간에 그런 일을 했다니 자유분방했던 것인지 철딱서니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별쭝맞은 것은 사실이다.
보따리 하나 들고 무작정 서울로 간 금순이도 생각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으니 아메리카대륙 서부 개척지의 종점이자 캘리포니아 주도인 샌프란시스코 인근 새크라멘트에 가서 짐 싸 들고 역귀국(逆歸國) 한다는 소리는 안 하겠지만 귀소본능(歸巢本能)을 완전히 지우기는 어려울 텐데 이제 정을 잠시 떼고 떠나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 역시도 우물 안의 미당 선생 생각인 줄 모르겠으나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
http://www.facebook.com/kimjyyfb
kimjyyhm@hanmail.net
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공학석사□전기안전기술사□PMP□사회복지사□국내여행안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