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미당 본가에 갔다가 친구 영식이를 만났다.
서울에서 내려와 집 방 남새밭에서 고추를 심고 있었다.
동생 영옥, 영란 그리고, 작은 쌍둥이 차식이도 와 있었다.
영옥이와 영란이는 대전에 살았기 때문에 또, 친정에 자주 왔기 때문에 여러 번 봤다.
차식이는 어렸을 적에 헤어지고 처음이었다.
다들 반가웠다.
손을 잡고 비비면서 좋아했다.
이제 너희도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했더니 동생들은 오빠는 늙지도 않고 옛날 그대로라며 건강하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지 마라.
너희가 육십을 훌쩍 넘겼듯이 나는 이미 훨씬 더 그 이상이다.
어디 가서 나이 얘기하면 할 말이 없지만 가는 세월 어쩌겠느냐.
나이에 걸맞게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너희도 그럴 거지.
그 말에 동생들은 예전보다 더 어린애가 된 듯 그렇겠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오빠 집은 어디냐고 물었다.
내내 대전 거기 향촌이라고 했더니 아직도 거기서 사시냐며 놀랬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어디로 이사 가기는 싫고, 가고 싶어도 용기가 안 나 어렵게 됐다고 30년 동안 그냥 눌러앉은 것을 정당화시켰다.
대신에 퇴직하고서도 하던 일을 하고 있다며 지금은 언니와 함께 전북 남원에 내려가 있다고 했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도 일을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영식이가 한 달 월급이 얼마가 넘는 고급 인력이라서 더 늦게까지 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쑥스러웠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융숭한 대접에 가깝다.
반면에 남는 게 별로 없다.
내 호주머니는 뜨거운지 돈이 들어가면 견디지 못하고 금방 나온다.
호주머니를 열어 시원한 바람을 불어 넣어야 좋단다.
농담을 들은 동생들은 멋지다고 하였다.
영식이가 동생들한테 종연이는 돈 벌어서 여러 곳에 좋은 취지로 많이 쓰고 있다면서 그렇게 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미 친정 본가에 정착한 영옥이는 밭에서 털부터니 앉아 풀을 매면서 “오빠, 나는 늘 이러고 있어”라고 하길래 “시골에 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건강 유지하면서 열심히 해라”라고 격려하였다.
영란이와 차식이한테는 “너희는 여기 어디에 집을 진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사실이냐” 하고 물었더니 바짝 다가와서는 저기 계양말에 한 채씩 지려고 시작했다며 좋아했다.
귀소본능으로 친정 동네에 와서 집을 지어 정착하는 것이 좀 그렇고, 결혼하여 도시에서만 살다가 시골로 들어와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 자신 있냐고 물었더니 꿈이자 로망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오빠는 안 그러냐고 되물었다.
나는 아니다.
시골이고 외국이고 잠시 들려 돌아보는 것은 좋아해도 눌러앉아 사는 것은 한사코 반대다.
누가 근사한 세컨드 하우스를 지어서 웃돈까지 얹어줘도 고맙다는 인사만 하지 절대로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더니 별난 오빠라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여튼 집이 다 되면 연락해라.
옛날식으로 집터 단단히 눌러줄 테니 말이다.
그랬더니 그러겠다고 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으로 출가하여 참한 가톨릭인이 된 차식이가 오빠 내외도 성당 생활 열심히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좋아했다.
50대에 나는 사목회장도, 언니는 성모회장도 하면서 뭔가 좀 한다고는 하지만 성직자와 수도자가 있는 네 시집과는 비교도 안 되는 날라리라면서 신망애 삼덕을 기리려고 정성 들이는 것으로 보속한다는 말로 아픈 곳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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