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살아보진 않고 가보기만 했던 청계천, 중랑천, 봉천동이 있다.
그 인근에서 잠시 기거하거나 머물렀던 곳이 있다.
광주 대단지(성남), 신월동 철거민 촌, 서초구 비닐하우스 촌이 있다.
거기가 판자촌이었나 할 정도로 의문이 드는 곳도 있다.
백과사전 자료를 검색해보니 불량촌 또는 해방촌으로 불리는 여러 곳의 판자촌이 나왔다.
물론 서울지역에 한정된 것이다.
오갈 곳이 마땅치 않은 근근한 사람들이 찾을 수밖에 없었던 외곽이나 외진 곳에 흩어져 있던 판자촌은 화려한 변신을 해왔다.
신흥 부촌으로 변모한지 오래 됐다.
강남의 영등포 일대(강서, 구로, 금천, 관악. 동작. 강남. 서초, 강동, 송파 포함)에 있던 판자촌은 강북의 부촌을 뒤로 밀어냈다.
그 것도 압도적인 차이로 그랬다.
판자촌은 노다지라고도 하고, 로또 이상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은 후회막급(後悔莫及)이다.
좀 고생스럽더라도 거기서 그냥 눌러 앉아 살면서 다 허물어져가는 판자촌 집을 몇 개 사고, 허름하고 헐값이던 땅 몇 백 평 사 놨으면 지금은 수십억 수백억 재산가가 됐을 텐데 하고 탄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그 때는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 그러니 허망한 짓이다.
한 때 판자촌을 전전하던 미당 선생은 상전벽해가 된 지금도 판자촌에 대한 미련이 없다.
오솔길로 개봉동 넘어가던 영등포 오목교 건너 신정동 말단에 살 때다.
논바닥에 지은 대지 50평에 건평 30평(?) 정도의 신흥주택 지대가 있었다.
집 매매를 놓고 곰방대를 문 복덕방 영감 중개로 실랑이를 벌였다.
구매자는 98만원에 사자. 판매자는 102만원 판다고 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100만 원짜리 집이었다.
당시 100만원은 만만치 않았다.
눈물겨운 주경야독을 하던 미당 선생 월급이 1만원을 갓 넘는 수준이었다.
계산해보면 집값과 화폐가치가 나온다.
100만 원짜리 집을 사려면 한 푼도 안 쓰고 저축한다면 100개월(8년)이 걸리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또 졸라 만원 월급 중에 반은 저축하고 반은 쓴다면 16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어떤 수준의 집인가를 가릴 거 없이 서울에서 서민이 내 집 한 채를 갖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한 가정의 숙원 사업이자 대역사였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목동 지구로 변모한 신정동 중간 급 아파트 평당 가격이 6,000만원이란다.
대지로 단순 계산하면 50평X6,000만원=30억이다.
연봉을 1억 짜리라면 30년, 5천만 원짜리면 60년이 걸리는 돈이다.
순리적으로 한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배고픈 서러움, 집 없는 서러움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고 한다.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안 되는 걸 놓고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속만 씨리다.
찬물 마시고 속 차리는 것이 좋다.
그런 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굳어진 생활신조가 된 사람들도 많다.
서글픈 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도 많으니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서울에서 판자촌이 사라진다는 기사다.
그게 사실일까.
그게 맞을까.
난해하다.
쉽지 않을 것이다.
판자촌을 개발하여 어려운 사람들한테 집 장만할 기회를 주면 거기 눌러 앉아 살 수 있는 것인지, 그런 혜택도 못 받는 또 다른 판자촌 주민은 어디로 가서 어떤 판자촌을 형성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고난도의 수학 문제이자 윤리 문제가 아닌가 한다.
집은 많아도 판자촌 사람들이 가질 집은 마땅치 않을 것이다.
여러 채, 어떤 사람은 수백 채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판자촌 철거민들한테 돌아갈 집은 화중지병이나 다름없다.
혜택을 준다 해도 수억에서 수십억의 건축비를 부담해야 하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한테 그만한 돈이 있을 수가 없다.
결국은 돈이 돈 버는 형태로 될 테니 판자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금요일 열차에서 내려 서대전역에서 택시를 탔다.
수침교를 건너는데 용문동 쪽에 고층 아파트들이 쭉쭉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언제 이렇게 많이 올라갔는지 신기하다고 하였더니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님이 아파트가 다 돼간다고 했다.
동구 지역, 선화동 지역, 괴정동 지역, 도마동 지역, 유성과 가수원 지구에 엄청난 물량의 아파트가 들어서던데 인구는 뚫고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어선 지금 누가 다 들어가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더니 그렇다고 하셨다.
세종과 유성 지역도 서울 투기꾼들이 빠져 나가 썰렁하여 투자 목적으로 들어갔던 사람들도 사는 게 불편하여 원도심이나 신흥 도심이었던 둔산으로 되돌아온다는데 참 문제라는 지적도 해주셨다.
집은 평수를 조금씩 늘려 이사를 해야 부자가 된다는데 우리는 30년 향촌 원주민으로 남아있다고 했더니 생활 여건이 그보다 나은 곳이 어디 있느냐며 위로를 해주시어 재테크 제로 빵인 사람인 것 같아 좀 부끄러웠다.
대전에도 판자촌 비스 무리한 꽤 있었다.
경부선과 호남선 철로 변을 위시하여 동구, 중구, 대덕구, 서구, 유성구의 구도심권과 변두리 지역이었다.
재개발 대상 지역과 달동네였다.
지금은 싹 밀어버리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형태인데 판자촌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고층이 있으면 저층이 잇고, 부자가 있으면 빈자도 있다는 논리가 맞아떨어지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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