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유보하고 선거인단 간선제 호헌을 유지한다는 담화문,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남영동 경찰 대공 분실에서 물고문에 의한 치사사건에 대하여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조사관의 거짓말과 사건 전모 은폐를 폭로하던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시국 미사, 연세대생 이 한열 군이 최루탄 파편을 맞고 피를 흘리며 친구들부터 시위 현장에서 병원으로 업혀가던 모습, 서울 시내 한 복판 명동에서 박수를 보내던 넥타이 부대들과 시위대에게 먹을 것을 날라주던 시장 상인들과 경적을 울리며 묵시적인 항의를 하던 운전사들, 기사 희생하여 정치무대로 재등장한 3김 정치인, 차기의 유력한 대권주자인 여당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다는 6.29 선언,......,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서슬 시퍼렇던 전두환 정권 제 5공화국 말기인 1987년 6월의 모습 즉, 6.10 민주화 항쟁의 모습들이다.
한 때는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금기시되던 것들이지만 이제는 그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있는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
그 때는 참으로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고 변화무쌍하게 돌아가던 격동의 세월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떤 세대이든 마찬가지 이지만 그런 우여곡절의 단계를 거쳐서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인데 아무리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을지라도 그 때의 일들과 모습들이 기억에 생생한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그 때는 내가 군대생활을 마치고 바로 시작한 직장생활 10년 차의 중견사원으로서 정신도 총명하고 시국에 대한 주관이 뚜렷했었고, 그 회오리바람의 한복판에 서 있던 분들이 생존하시어 나라의 원로로서 계신데 그 역사의 흐름을 잊는다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오늘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해보게 된 것은 국악(國樂)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영상물 하나 때문이었다.
한국 무용가이자 인간문화재인 이 애주 교수님의 5분 여짜리 살풀이 춤 동영상이 그 것이었다.
6.10 민주화 항쟁 당시 이 한열 군의 장례 운구 행렬 맨 앞에서 맨발 소복차림으로 권력의 폭거에 항의라도 하듯이 침묵으로 일관하였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살풀이춤을 추던 이 애주 교수님은 고집불통의 젊고 기발한 춤꾼 모습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말해주는지 최근에 만들어진 동영상을 보니 본바탕은 예전 그대로이셨으나 몸이 불으시어 중후하게 느껴졌고, 평범한 하얀 한복을 입으시고 수건을 펄럭이며 정열을 기울이는 춤사위가 중량감 있고 세련미 있이 느껴졌다.
그 때나 지금이나 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대단하신 분이라는 인상이다.
인터넷에서 인물 란을 검색해보니 1947년생이시다.
그러니까 그 때 당시의 나이가 만 40세이셨다는 이야기인데 정교수 신분은 아니고 전임강사나 조교수 정도였을 테지만 그 나이에 우리나라 최고 대학의 교수 신분이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공무원 신분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받는 국립 대학교 교수로서 반체제 구호를 외치던 학생 장례행열에 참석하여 추모하는 춤을 춘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 상징성과 미치는 여파가 대단하여 불순한 공무원으로 낙인찍혀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도 그런 것은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자청하고 나서서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춤으로 예술가로서의 할 일을 하였으니 그 용기는 더 대단한 것이었다.
살풀이춤을 추시는 그 분의 동영상을 몇 번이고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살풀이춤의 대가인 그 분도 이제 누군가의 넋을 위하여 그 춤을 추는 것을 접을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무더운 학교 강당에서 손자와 손녀뻘 되는 후학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살풀이춤을 가르치면서 이 춤은 천수를 다 한 자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우리 전통의 춤이니 너희들이 그 대를 이어야 하니 열심히 하라고 밝은 표정으로 말씀하시는 인자한 노교수의 모습일지언정 억울한 죽음을 당한 불쌍한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노구를 이끄는 춤꾼으로 나와 뜨거운 땡볕아래의 아스팔트길에서 무겁고 비통한 표정으로 맨발의 살풀이춤을 추시어 보는 이들을 슬프게 만드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이나 나나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만은 없는 것이 세상의 일이니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애처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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