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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애처로운 두만강

by Aphraates 2008. 8. 15.
 

8.15 광복절(光復節)이다.

광복절을 건국절이라고 바꾸자는 이야기도 있는 거 같은데 기나긴 세월 동안 일제 치하에 있다가 해방되었다는 의미가 더 크지 이름이야 아무렴 어떤가?

광복절 하면 독립군이 떠오른다.

그리고 독립군 하면 만주 벌판과 두만강이 떠오른다.

또한 두만강 하면 다시는 되돌아 넘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자와 그런 애처로운 두만강을 노래하신 원로 대중가수인 고(故) 김정구 님이 생각난다.

그 분은 외세에 나라를 빼앗기고 낯서른 남의 나라로 몰래 들어가 한 많은 일생을 살아야 했던 실향민 동포들의 애절함이 담긴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신 분이시다.

그 시절 악단 가수라고 해봐야 호구지책도 안 되던 처량한 신세인지라 제 가정도 간수하지 못하는 딴따라라고 괄시도 당하고, 말년에는 국민훈장까지 받는 인기가수로 각광을 받는 영욕의 삶을 사시었다.

자신과 가정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할 것이라고는 노래밖에 없다며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무대에서 노래를 하신 걸로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가수는 직업치고는 평생 돈벌어주는 직업이어서 좋고,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일을 평생 하셨으니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가수로서 남모르는 애환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눈물 젖은...

그 노래가 나의 애창곡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다른 연예인들과 마찬가지로 한 많은 일생을 산 그 분에 대해서는 그래도 멋진 인생을 살알다는 생각과 함께 가슴 아픈 기억도 있다.

그 분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일이다.

연세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수로서 본격적이고 정열적인 활동을 할 때는 지나서 어디에서고서 불러만 주면 나가서 소일거리로 노래를 하시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텔레비전을 켜니 그 분께서 노래를 하시는데 영 아니올씨다였다.

바람이 무척 세게 불고, 두터운 오버를 입어도 추운 한 겨울의 쓸쓸한 야외 무대였다.

국민가수이자 원로 가수인 그 분의 격에 안 맞게 작고 초라한 무대에서 어색하고 어렵게 노래를 하시는 것이었다.

무대 뒤편에 있는 간이 악단은 기타, 아코디언, 드럼 등 몇 명 안 되는 악사로 구성된데다가 연주하는 폼이 영 짜증스러운 것이 연주 소리도 제대로 나질 않았다.

관중석은 널따란데 텅 비다시피 하였다.

다 먹고 난 옥수수자루에 실수로 몇 알 박힌 옥수수 알갱이처럼 몇몇 안 되는 노인과 뛰어 노는 약간의 아이들뿐이었다.

그 분은 유행지난 허름한 정장 양복 차림에 꺼칠한 모습으로 떨면서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시었다.

그 모습이 여간 애처로운 것이 아니어서 프로그램 제작 담당자한테 당장 전화하여 그만하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계속해서 손을 내미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노래를 부르시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그 노래의 노랫말과도 비슷하게 처량해 보이던지 1절만 하고 무대에서 내려오셨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옆에 있던 데보라도 그 모습이 보기가 안쓰러웠는지 “날씨도 춥고 만 노인양반이 저러다가 병이라도 나시면 어쩌시려고 왜 저러고 계신지 모르겠네” 하면서 혀를 찼다.


당신께서는 의미 있는 노래를 의미 있는 자리에서 의미 있이 부른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초라한 모습으로 애처로운 두만강을 노래하시는 분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맘에 걸렸다.

그리고 저 분이 왜 저렇게 노래를 불러야 하시는 것인지 생각 안 할 수가 없었다.

노래를 안 하면 오금이 저려 족보도 뚜렷하지 않은 탐탁지 않은 초청이지만 출연에 응하신 것인가?

북풍 한파가 몰아치는 삶의 노고에 시름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대중가수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시는 것인가?

돈은 떨어지고 아이들 집칸이라도 장만해 줘야 하는 처지에서 며느리 눈치가 보여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하여 노구를 이끌고 썰렁한 무대에 서서 떨며 노래를 부르시는 것인가?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올랐는데 그 모습은 마치 두만강을 건너며 고국 땅을 돌아보고 눈물로 노래하는 노래 속 유랑자들의 한스러운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애처로운 두만강을 노래하던 그 분은 가셨다.

그리고 노랫말 속의 주인공인 만주 벌판 이주민 동포들도 조국 잃은 한을 남긴 채 거의 다들 가셨다.

또한 그 자리 메김을 하던 그 동포들의 2세와 3세들은 중국 곳곳에서 흩어져 중국과 한국의 연결 다리 역할을 하면서 당신들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고 있어 연변 자치주가 붕괴될 위기에 놓여있다.

그러니 이제 누가 있어 눈물 젖은 두만강의 설움을 달래줄 까?


오늘은 천주교 전례력으로 부활, 성탄, 성령 강림 대축일과 함께 4대 축일의 하나인 성모승천대축일이기도 하다.

당연히 거룩하고 즐겁게 보내야 하는 날이다.

그렇지만 마음뿐이지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면서 죄송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눈을 감고 미지의 신천지 두만강을 생각하자고 굳은 맹세를 하지만 눈을 뜨면 애처로운 두만강이 자꾸만 아른거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삭풍이 몰아치는 관중 없는 허름한 무대에서 나오지도 않는 노래를 억지로 부르며 반향을 살피던 애처로운 두만강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부족함이겠지만 그런 부족함이 만회되기는커녕 더 부족하라고 재촉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성인군자라도 여간 서운하고 고달픈 것이 아닐 것이다.

줄어들지 않는 무수한 날인 거 같아도 거룩하고 즐겁게 지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 우리들의 날들인 것을 애처로운 두만강이나 부르고 듣는 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다.


원로 가수가 감정에 복받쳐 눈을 지그시 두만강을 열창하고 있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다.

날씨는 춥고, 밴드는 제 멋대로 틀리기 일쑤고, 관중은 그런 노래는 제발 그만 좀 부르라며 아우성이고, 연출자와 스텝진이 요랑 소리 나게 뛰지만 뭐 되는 일이 없고, 푼수에 주책바가지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자기들 편에서만 바라보면서 엉뚱한 것에 눈에 불을 쓰고 밝히고 있다.

그렇게 환상적인 불협화음의 조화로움이 그대로 굳어져 흘러가고 있으니 누가 있어 훗날에 그 뒤치다꺼리를 마무리하여 환상적인 화음의 조화로움을 이루게 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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