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그러리니 하면서도 이기는 삶

by Aphraates 2008. 11. 17.

다락골 줄 무덤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그 곳은 고향에 위치한 성지이고, 80년대 중반 개발 초기부터 참여하면서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열의가 식었는지 가본 지 지 몇 년 되어 미안하던 차였는데 구역에서 그 곳으로 성지순례를 간다고 해서 좋았다.

더구나 지난주에 있었던 새로운 성전 봉헌식에 다른 일로 인하여 참석하지 못하여 서운했었는데 웅장한 성전에서 감명 깊은 야고보 신부님의 강론과 함께 미사참례를 하니 더 의미 있는 성지순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수백 명의 순례객들한테 산채 비빔밥을 제공하기 위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잘 아는 청양 본당 교우들을 보니 무척 반가웠고, 성지 개발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손이 가야 할 텐데 신부님과 교우들의 그런열기라면 거뜬히 해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신부님의 강론은 그러리니 하면서도 이기는 삶을 갖자는 내용이었는데 성지순례 와서 너무 많은 것을 체험하려고 하면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한두 가지만 알고서 가라고 하셨다.

성지와 일상적인 삶과 연결시켜 진행된 1시간여의 강론은 알아듣기 쉽고 감동적이어서 눈물을 흘리는 교우들이 많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에 열심히 하고 즐기며 이기는 삶을 살아야지 할 수 없는 일에 질질 끌려 다니며 지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니 그 때는 그러리니 하고 살라고 하였다.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권력과 명예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지는 삶이고 주어진 것만큼 누리며 사는 것은 이기는 삶인데 박해를 통하여 죽임을 당한 무명 순교자들이 이긴 삶이란 것을 매일 아침 무명 순교자 1,2,3 줄 무덤을 돌아보면서 느끼신다고 하셨다.


강론을 듣고 나니 찌든 삶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우연히 만난 “노래하는 순례단”의 특송(特頌)도 좋았다.

열 명도 안 되는 단원이지만 화음이 잘 맞아 은은한 성가 소리가 성당에 가득 퍼졌고,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수수한 차림의 지휘자 자매님과 정성스럽게 반주하는 자매님도 인상적이어서 우리도 저렇게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땅이 안 보일 정도로 낙엽이 덮인 “십자가의 길” 14처가 서 있는 산비탈을 올라가면서 기도를 받치는데 그 모습과 기분이 가히 환상적이었고, 산 말랭이 줄 무덤에 가서 무명 순교자들의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노라니 가슴이 뭉클했다.

하산하여 바람이 쌀쌀하고 약간 추운 성지 주차장에서 준비한 족발을 안주로 하여 청양 교우들도 참석하여 한 잔 하는데 화기애애하였고, 남은 것을 갖고 차에 타고서 흔들거리며 나누는 다른 한 잔도 좋았다.


헌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적중했다.


차 안에서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이자 성지순례를 주관한 교우가 많이 도와주셔서 성지순례를 잘 맞췄다는 인사말을 하고 이어서 성지순례 추진 관계자분들과 낯서른 분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인사를 시키고 우리들은 박수를 쳤다.

향촌에 도착할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마지막으로 사회자가 간단한 저녁식사를 한다는 공지사항을 마이크를 껐다.

그런데 뒤에 앉은 두 교우가 “우리들은 사람도 아니고, 구역원도 아닌가?”하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고 보니 구역 활동에 늘 같이 하고 열심이어서 이무로운 두 사람만 인사 소개에서 빠진 것 같았는데 그런 것에 신경 쓸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운했던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집으로 가버렸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주관자한테 나와서 같이 식사나 하게 두 사람한테 전화를 해 보라고 하였더니 바쁜 일이 있다며 시큰둥하더란 것이었다.

그런가보다 하고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와서는 안 올려다가 서운해서 한 마디 하려고 왔다면서 얼굴이 불거지면서 자기들을 무시했다고 서운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다들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하다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소개하는데 빼 놓은 것은 실수한 것이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걸 갖고 노여워할 처지가 아닌데 왜 그러느냐며 이해하라고 하였다.

그래도 자꾸 서운한 이야기를 하니까 못 마땅하게 여기며 정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어쩌겠느냐며 별 사람 다 보겠다는 식으로 무시하고는 헤어졌다.

성지순례 감명 깊고 즐겁게 잘 다녀와서 그래서는 안 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갖고 서운해 하는 것을 보니 참 기가 막혔다.

신앙심도 깊고, 사람들도 착하고, 나이도 오십 줄에 들어선 사람들인데 그런 정도 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에 화가 났지만 관계자들이 잘 알아서 마무리 질 것이라며 데보라와 함께 성지순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회사와 관련하여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매시지가 와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 회사로 전화를 해 봤더니 메일로 자세한 내용을 보냈다고 하였다.

서둘러 피시를 켜고 장문의 메일 내용을 보니 회사 식사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였는데 이 것도 참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그만한 그릇에 그만한 소견이니 그런 생각을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니 이해한다면서도 이 사람들이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들인지 오 십이 넘은 가장이자 중견사원이라는 사람들인지 모를 정도여서 대꾸할 가치조차도 없는 하찮고 우스운 안건이었다.

누구누구가 그런 분란의 주역인지 짐작이 가고, 어떤 식으로든 교통정리는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간단명료하게 답을 줬다.

그렇지만  참 세상 물정 모르고 자기들만 아는 한심하고 좁쌀스런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분골쇄신하는 정신으로 임해도 모자란 판에 그런 일이나 갖고 티격태격하고 있다니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거대한 조직에서 살아남아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것인지 측은지심이기도 했다.


어제 저녁에는 두 일로 열 받았지만 그러리니 하는 것이 이기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침나절은 아무런 일 없는 듯이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계속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역시 자신과의 싸움이 아닌가 한다.


http://blog.daum.net/kimjyyhmhttp://kimjyykll.kll.co.kr

김종연 : 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프지 말아야지  (0) 2008.11.19
별 일 없으세요?  (0) 2008.11.18
책잡히지 마!  (0) 2008.11.16
배(背) 들어가게  (0) 2008.11.15
물어라도 좀 보세요  (0) 2008.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