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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초기진화(初期鎭火)

by Aphraates 2008. 11. 21.

전에는 벼 심은 논에서 김을 여러 번 매고 피사리도 수시로 했다.

그만큼 벼 성장과 수확에 지장을 주는 잡풀과 피가 많았고, 쌀 한 톨이라도 더 거둬들이기 위한 농부들의 정성이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지금은 독한 농약 때문인지 잡풀과 피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피가 있는 논에서도 피사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 보기가 흉한데 그만큼 농부들의 정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일손도 딸리고, 수확해봐야 피사리를 고려한 품값도 안 되는 것을 그럭저럭 되는대로 먹자는 식이다.


김매는 것과 피사리는 약으로 하던 수작업으로 하던 제 때에 해줘야 좋다.

때를 놓쳐 조금만 늦어지면 잡풀과 피가 극성이어서 제거하기 힘들고, 그 잔재인 뿌리와 씨앗이 논에 남아있어 그 이듬 해에도 자라나는 벼보다도 빠르게 성장하여 논을 호랑이 숲으로 만든다.


피사리하는 것은 참으로 지긋지긋했다.

공주와 대전에서 하숙생활을 하던 때에 토요일 날 집에 아버지와 형님들이 피사리 나가자고 하셨는데 안 갈수도 없어서 쫓아가서 해보면 여간 고역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는 방법도 몰라 일하는 것도 서툴지, 햇볕은 쨍쨍 이지, 뜨뜻미지근한 논물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화끈거리지, 무성하게 자란 벼가 살갗을 스치면 상처가 나고 쓰라리지, 별의별 벌레들이 다 날아다니며 물어 근질거리지, 친구 녀석은 저만치에 서서 나를 기다리지......, 그 피사리를 생각하면 집에 가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일요일이면 꼬박꼬박 집에 갔던 것은 집이 그만큼 좋았기 때문이었다.

요즈음도 농번기에는 학교 다니는 아이들한테 일을 자주 시킨다는 소리를 듣는데 그럴 때 마다 나의 옛 시절을 생각하여 어지간하면 어른들이 좀 고생하고 아이들은 시키지 말라고 말하지만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이 수능시험 며칠 안 앞둔 놈들도 잡아다가 시킬 판이라고 했다.


피도, 불도, 병도 초기에 잡아라.

농부가 아니고, 소방관이 아니고, 의사가 아니라도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게 잘 안 된다.

피가 나오는 대로 싹싹 뽑아 줬으면 논이 깨끗하여 벼만 예쁘게 자랄 텐데 좀 한 눈 팔다 보면 벼 반 피 반의 논이 되고, 불이 시작되었을 때 빨리 대처하였으면 소화기 하나로 진압되었을 텐데 번지고 나서는 소방차와 화학차를 들이대도 안 꺼지고, 병이 발병되었을 때 이내 치료했으면 간단한 주사나 약물로도 가능했을 텐데 만성이 되고 나서는 최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메스를 가해야만이 해결이 된다.

그 것도 원상 복구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잘 된다 하여도 원형 근처를 맴돌 뿐이니 무관심과 초기 진압 실패가 얼마나 큰 손실인지 모른다.


오늘 어깨 아픈 종합 진찰 결과를 알아보기 위하여 병원을 찾았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원인 규명이 되었다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선생님 : 어깨를 많이 쓰시나요? 이를테면 심한 노동이라던가, 강력한 헬스 운동이라던가 말입니다.

김(金)환자 : 전혀 아닙니다. 팔을 쓴다고 해봐야 목운동 할 때 술잔을 들어올리는 팔 운동과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정도입니다.

선생님 : 그러시면 최근 또는 오래 전에 팔에 무리한 힘을 가하여 아팠던 적이 있으신가요?

김환자 :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선생님 : 그렇군요. 이 사진을 좀 보세요. 이 곳이 팔과 어깨뼈가 연결되는 부분으로서 원형이어야 하는데 일그러졌고, 주입한 약물이 그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지요? 인대가 많이 손상됐습니다.

김환자 : 그렇군요. 제가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이 있는 것 같은데 심각한 상태인가요?

선생님 : 그렇지는 않습니다. 초기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레이저 수술로 치료하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 퇴행성 관절 즉, 오십 견이라고 하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나아질 수는 없는 상태입니다. 수술 하셔야 합니다. 별 거 아닌 것으로 알고 그대로 두었다가는 두고두고 고생하십니다. 초기에 발견하지 못하거나 방치했다가 늦으막까지 고생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김환자 : 선생님 말씀에 따르겠지만 얼마나 큰 수술인지 궁금하고, 많이 아프지는 않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약물치료는 안 될까요?

선생님 : 걱정할만한 정도는 아니니 편안하게 맘 갖고 수술하여 한 번에 근원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좋습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시어 수술날짜를 잡으시고 입원 수속을 하시도록 하세요.

김환자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팔이 앞뒤로 제대로 안 돌아 갈 때 바로 병원을 찾았더라면 이렇게 까지는 안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들 그렇게 살듯이 좀 이상 있다 말겠지 하고 그대로 둔 것이 입원을 하고 수술해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병명을 모르거나 치료하기 어려운 큰 병은 아니라 다행이다.

그렇지만 수속을 밟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몸 아프고, 시간 빼앗기고, 돈 들어가고, 사람들한테 걱정 끼치고, 한 동안 시달려야 하고......, 주민등록상의 생일날인 오늘 초기진화를 못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http://blog.daum.net/kimjyyhm   http://kimjyykll.kll.co.kr

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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