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大田)은 다른 분야에 비해 문화예술이 활발치 못 하다는 평이다.
대전에 근거지를 두고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저명한 예술가가 그런 언급을 하여 화가 치밀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니 그럴 테지만 괘씸한 생각에 좀 삐따닥한 표정을 지으며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다.
살기 좋은 대전이라는 평이라면 문화예술의 불모지대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인 서울과 경인 지역이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다보니 대전에서는 문화예술 흥행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도시가 팽창하면 인근 소도시가 덩달아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침체되어 쪽박을 차는 꼴이 된다는 이치와 같았다.
작가이자 문화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고 창피했다.
등한시한 것도 사실이었다.
연극이나 콘서트 관람은 고사하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지도 오래 되었으니 그 말을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춥고 배고픈 문화예술계다.
가장 바람 안 타고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분야가 오히려 바람에 흔들리다 못 해 뿌리까지 뽑히는 격이니 정신적인 피폐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긴 교육 주무 장관이 먼 장래를 바라보는 학문보다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인 취직이 먼저라고 공언할 정도니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간다면 장기적으로 득보다는 실이 훨씬 클 텐데 지역이나 중앙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지 고심해야 할 거 같다.
쪼그라드는 문화예술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는 없다.
실질적인 행동 없이 걱정만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할 것은 아니겠지만 작가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작을지라도 면피활동을 해야 했다.
작은 보속(補贖)을 하는 의미에서 영화관을 검색했다.
여차 하면 한 번 가볼 양이었다.
대전도 13개 개봉관이 있다.
규모는 어떤지 모르겠다.
숫자적으로 볼 때 예전에 비해 많이 퇴보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전 시 인구가 30만이라고 하던 1960년대 말에도 급수는 다르지만 대략 10개 정도의 극장이 있었다.
문화예술 수준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던 그 때 기준으로 따진다 해도 현재 인구 150만인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그 때의 다섯 배인 50개 정도의 극장은 있어야 한다.
아무리 다른 영상매체가 많은 시대라는 것을 감안한다 해도 그 때의 5배는 못 된다 하더라도 1/5 수준이라는 것은 부끄러운 실태다.
영화관은 영화관대로 좋다.
디지털 시대를 수동 시대로 맞춰도 잘 맞는 것이다.
집에서 편안한 자세로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는데도 번거로움을 마다 않고 굳이 영화관을 찾는 것은 그만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영화는 영화관에서 대형 화면을 통하여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팝콘을 먹어가며 봐야 제 격이다.
수고를 해도 그럴 만한 메리트가 있는 것이다.
여학생들 뒤꽁무니를 따라가 영화관에 들어가긴 했는데 영화를 보기 보다는 칙칙한 분위기를 마다 않고 여학생 동정 살피기에 급급했던 그 때 그 시절의 추억어린 장면과도 상통하는 면도 있다.
감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도 야동 같은 은밀한 밤 문화와 거리를 두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위성 통신 접시 안테나를 달은 지 수 년째이지만 제목만 봐도 남자들이 솔깃한 유료 영화를 한 편도 안 봤다.
몇 번이고 되풀이 방영하는 영화 전문 채널의 해묵은 영화를 보기는 해도 야한 것은 안 봐지고 코믹이나 스릴러만 봐 진다.
최신작이나 화제작에 대한 영화 관람이나 텔레비전 시청이 잘 안 된다고 해서 문화예술 감각이 떨어진 것은 아닌 것이 다른 분야의 문화예술 감각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 그를 증명하는 것이다.
천만 관객 영화가 등장해도 그를 추종하지 않는 것은 영화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안 보면 뒤처진다는 다급증에서 영화관을 찾는다는 무슨 증후군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극장이라면 어린 시절 애환이 깃들여 있다.
미당 선생의 소싯적 까까머리 증학생 시절 얘기다.
그 때 공주(公州)에는 극장이 둘 있었다.
충청남도 내륙을 대표하는 지방 소도읍이자 대학이 두 개나 위치해 있는 쟁쟁한 도시인 공주인지라 극장 규모가 제법 컸고, 주로 방화 위주로 절찬리에 영화가 상영되었는가 하면 가끔은 전국을 순회하는 대형 쇼 공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현재 공주북중학교 앞쯤으로 기억되는 곳에 있던 구식 건물인 공주 극장과 현재 농협중앙회 옆 의료원 삼거리 부여 가는 큰길가에 있던 비교적 신식 건물인 호서 극장이 있었다.
하지만 극장과 영화 관람은 아이들에게는 특히, 인근 다른 소도읍이나 농어촌에서 유학 온 촌놈들한테는 그림의 떡에 가까웠다.
영화에 호기심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영화가 아이들 관람불가였고, 영화를 볼 만한 돈이 없었다.
공주에서 3년 동안 하숙하면서 영화 구경을 얼마 하질 못 했다.
경찰관인 사촌 형님이 시켜준 것, 학교에서 단체로 간 것, 유명한 영화라고 해서 혼자 몰래 들어간 것 등 합해봐야 열 손가락의 반 정도나 됐을까 말까였다.
그래도 영화관에 대한 추억은 아련하다.
요즈음도 공주에 가면 그 때 그 자리를 더듬어보곤 한다.
호서극장 자리에는 옛날 그 건물과 비슷한 건물이 있는 것이 아마도 리모델링해서 다른 용도로 쓰는 것 같고, 공주 극장은 제민천을 건넌 곳에 위치한 교동인가 봉황동인가 하는 어느 곳이었데 어딘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여기쯤일 거라는 생각만 하곤 한다.
극장 풍경이 떠오른다.
앞에 걸린 커다란 영화 간판과 길게 늘어트린 만국기,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처량한 영화 대사와 노랫소리, 시내 곳곳에 붙은 영화 포스터, 앞에는 북 등에는 영화 포스터를 붙인 판때기를 메고 걸어 다니며 영화 선전을 하던 눈이 툭 튀어 나와서 아이들이 쫓아다니며 눈깔이라고 부르던 좀 모자란 듯 하지만 용감하여 금강에서 익사사고가 나면 자원 잠수부 역할을 하시던 아저씨가 생각난다.
극장의 상징인 메인도 있었다.
지금으로 봐서는 낡은 것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최신인 영사기다.
간간히 흐르던 음악이 끊기고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극장 안의 불이 꺼지면 2층의 영사관에서 영사기가 드르륵 드르륵 돌아가면서 강한 불빛을 내쏘며 앞의 대형 화면에 흑백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사기는 빛을 쏘는 작은 구멍을 통하여 볼 수가 있었는데 커다란 바퀴가 아래위로 두 개가 달려 있어 하나는 필름을 풀어주고 하나는 필름을 감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기술이 진보한 지금도 영사기 논리야 비슷할 것이다.
예전과 달리 첨단 시스템으로 변했을 것이다.
구닥다리 영사기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면서 흘러간 추억의 얘깃거리로나 쓰일 것이다.
영사기는 과거를 되돌리는 이야기를 할 때도 인용된다.
요즘 들어 부쩍 과거회귀 얘기가 많이 나온다.
별 거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도를 넘어서는 것 같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는 한반도 상황과 사람 사는 세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고(故) 일석(一石:이희승) 선생님의 자서전을 보는 읽는 중인데 그런 기록물이 아니라 현실이 영사기를 되돌려 과거 시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여서 안타깝다.
영사기를 되돌리는 듯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박종철 열사와 삼청교육대 얘기도 등장했다.
역사물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연관된 것들이다.
지금의 30대 들이 태어날 때의 일들이니 40대 들이나 돼야 그게 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텐데 과거의 슬픈 사실들이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픈 과거사이지만 다시 회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다.
어찌하여 한 세대(30년)도 넘은 얘기들이 회자되어 그 때 그 시절의 아픔을 되살리는 것인지 그게 뭔지를 알고 있는 연배의 한 사람으로서 정오(正誤)와 목적(目的)의 문제를 떠나서 유감이다.
필요하다면 과거도 끄집어내고 미래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첨단 디지털 시대일지라도 아날로그가 아니라 진공관이나 변사의 육성(肉聲)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야 일시적인 간보기 수준이어야지 깊이 자리 잡아 근본을 뒤흔드는 정도가 돼서야 아니 될 말이다.
일각에서는 흘러간 물들이 볼썽사나운 난타전을 벌이고, 또 다른 일각에서도 역시 흘러간 물들이 혐오스런 자살골 장면을 답습하고 있다.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는 것은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지만 아믄 상처를 도로 생채기내는 것은 아는 것 같다.
추억의 영사기가 아니라 치부를 드러내는 영사기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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