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이었다.
1월에 32사단 예하 청라 대대를 거쳐 만기 제대를 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한남동 학교에 복학했다.
입대하기 전에도 생활고가 컸는데 제대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집에서 학비를 도움받을 형편이 못 됐고, 야간 직장을 잡으려던 계획도 수포가 되어 막막했다.
자신이 자신을 생각해도 불쌍했다.
시내 버스비를 걱정할 정도였다.
나이 든 복학생이 몇몇 있어 서로를 위로하면서 겨우겨우 학교에 나갔지만 간드랑간드랑했다.
결국은 주경야독이 아니라 주독야경(晝讀夜耕)에 들어갔다.
신문 광고를 보고 용산 미8군 정문 앞 남영동 J 가구 외판원으로 나섰다.
거기에도 한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근근한 동병상련의 청년이 몇몇 있어 함께 세일즈를 하며 버텨냈다.
세일즈 상대는 주로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였다.
세일즈는 고객 상담을 잘 해야 한다.
언변도 좋고, 인테리어 그림도 잘 그릴 줄 알아야 설명하기가 쉬웠다.
미당 선생은 둘 다 잠방이였다.
S 대 중퇴생이라는 동료에 얹혀 연명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어찌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빈궁했다.
남영동에서 후암동 가는 사거리에 있던 분식집에서의 저녁 식사인 잡채밥은 기막히게 맛있었고 든든한 한 끼였다.
그 당시 서울은 아파트 붐이 막 일고 있었다.
부자 동네로 통하는 여의도 아파트 입주가 거의 끝나가고 이어서 수침지역을 메꿔 단지를 만든 반포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복덕방을 비롯한 장사꾼들은 대거 반포로 몰려들었는데 가구 장사도 그중의 하나였다.
땀이 흠뻑 젖고 다리가 퉁퉁 부을 정도로 헤집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막 입주를 시작한 고속버스터미널 건너편 허허벌판에 세워진 5층짜리 반포 H 아파트에 입성했다.
한 집에 들러 가구 세일을 하는데 주인이 어디서 많이 보던 중년의 아주머니였다.
가구 세일즈맨들은 대개 이삿짐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신문사 지국 사람들은 이삿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집 짐 정리를 하다가 잠시 담소를 나누면서 가까이 보니 주인인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었다.
낯이 익은데 혹시 고향이 충청도 청양, 공주, 대전이 아니시냐고 물었다.
주인이 얼굴을 앞으로 내밀면서 어디서 봤는지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기억이 안 나 고개를 가로 저으며 탤런트라고 하셨다.
그때서야 텔레비전에서 가정주부나 보통 사람 단역(조연)으로 종종 나오던 그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몰라봐서 죄송하다며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라고 하였다.
인기 연예인 반열에 끼이는 편은 아니었으나 화면에 등장하는 연예인을 가구 장사하다 만났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분이 보기에도 젊은 사람들이 괜찮게 보이셨던지 몇몇 가구를 사 준 것으로 기억된다.
그분이 K 여우(女優) 김영옥 씨다.
며칠 전에 화제의 인물로 등장했다.
최고령 주연 배우가 되셨다는 것이었다.
언젯적 그분인가 하고 감탄하면서 프로필을 자세히 살펴봤다.
1937년생으로 올해 85세 연세였다.
그러니까 반포에서 직접 대면했을 때는 1977-1937=40세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꽃 각시다.
미당 선생은 그 때 나이가 1977-1952=25세 꽃 총각이었다.
K 여우 님.
대단한 노익장이시다.
원숙한 연기는 물론이고 광고 모델로도 진가를 발휘하고 계신다.
건강하시고 하실 수 있는 데까지 하시면서 당신도 즐거우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선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울러 미당 선생도 파이팅이다.
40대 초반이 80대 중반으로 된 그분과 그때 단 한 번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20대 중반이 70대로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으니 비대면의 해후다.
위축되지 않고 그분을 잘 따르고 싶다.
세상일이란 게 알 수 없으니 뭐라 장담할 것은 아니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명제는 여기저기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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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공학석사□전기안전기술사□PMP□사회복지사□국내여행안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