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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모시겠습니다

by Aphraates 2022. 7. 29.

전기밥솥, 모시겠습니다.

 

그동안 맛있는 밥을 만들어줘 고마웠습니다.

천수를 다하셨답니다.

전문가로부터 이제 더 이상 본연의 역할을 하기가 부적절하다는 최종 판정을 받았으니 편안히 쉬세요.

후임한테 문제가 생겨 재등장하실 여지는 있으나 거의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으니 막연한 기대 같은 거랑 하지 마세요.

오히려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영면으로 들어가실 확률이 높으니 순명하시면서 그동안 할 일을 훌륭하게 해내신 것으로 만족하시고 너무 서운해하시지는 마세요.

 

전반과조의제문(电饭锅弔義帝文)이다.

대충 잡아도 20년은 넘게 쓰다가 입고시키는 전기밥솥에 대하여 정중하게 올리는 감사와 평화의 간구다.

 

전후좌우 사정은 이렇다.

 

오랫동안 쓰기도 했다.

몇 번인가 압력 파킹을 갈아가면서 내솥이 너덜거리도록 잘 썼다.

밥솥도 연만하시면 어쩔 수 없는지 골골하기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어 불편했다.

하는 수없이 같은 회사 제품 같은 크기의 새로운 것을 하나 샀다.

압력 유지도 안 되어 새고, 안내 알람도 나왔다 안 나왔다 자기 맘대로고, 어느 때로는 고두밥 어느 때로는 죽으로 밥도 잘 안 되는 것을 더 고수할 수는 없었다.

잠수시키다시피 하여 깨끗하게 씻어 말려 놓았다.

8층의 개인택시 운전사 양반이 가까운 곳에 OO A/S 센터가 생겼다고 하여 돈이 좀 들더라도 수리하여 비상용으로 놔두려고 그랬다.

 

전기 제품을 물로 씻었다고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미당 선생은 전기 전문가다.

무식하고도 섣부르게 금지된 그런 작업을 할 리가 없다.

분리할 것은 분리하고, 봉할 것은 봉하여 씻고 한 열흘 통풍이 잘되는 앞 베란다에 햇볕을 쫴가며 말렸다.

전기 절연과 성능 보증에 문제가 안 될 거라는 확신하고 오랫동안 입고된 상태로 있던 테스터를 꺼내 절연을 비롯하여 몇 가지 필요한 측정과 검사를 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세척과 진단은 옳았다.

전기 회로 선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압력 상태나 열전달 시스템만 손보면 재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기밥솥 행차에 나섰다.

봉수산에 갖고 갈 쑥떡을 맞출 겸 해서 차를 운행하여 방앗간을 거쳐 OO A/S 센터에 부부 동반으로 갔다.

큰 가방에 넣어간 밥솥을 담당 직원 테이블에 얹어 놓으며 손 좀 봐달라고 하였더니 직원이 얼른 꺼내 코드를 꽂았다.

그러면서 박장대소하였다.

왜 그러는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설명을 했다.

이 제품은 수명이 다한 것을 넘어 너무 오래 사용하셨고, 여기 압력 부분이 망가지고 내 솥 코팅이 다 벗겨지고, 파킹도 이완되고, 작동 상태도 원활치 않아 수리를 안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 수리를 하신다 해도 비용이 새것을 사는 것만큼 들어가니 급할 때를 대비하여 보관하든가 폐기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설명이 끝나자 셋이서 함께 웃었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안 되겠다고 하였더니 밥솥을 가방에 널어 건네주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방문이나 연락을 달라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신문에 날 정도는 아니어도 창피 사건이었다.

알뜰살뜰하고자 그런 것은 아니고 쓰다 보니 그리된 것인데 모양새가 아주 좀스럽고 궁색하게 됐다.

얼른 나와 저만큼 서 있는 노상 주차장 관리원한테 손짓하며 돈을 받으러 오라고 하였더니 그냥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밥솥 창피 사건을 좀 커버해주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어서 돈 받기가 미안해서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만 몇백 원이라도 깎아주면서 그냥 가라고 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서로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

직원이 그렇게까지 딱 잘라 말할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니 몇십 년 동안 쓴 밥솥을 수리한다고 나서며 주책 부린 우리가 이상하다는 결론이었다.

노령의 전기밥솥을 넉넉한 가방에 넣어 지퍼를 채우고는 뒤 베란다 창고에 입고시켰다.

간이 거수경례하면서 이렇게 편히 모셨으니 잘 계시라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니 오늘도 한 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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