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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연의 수필 서재
수필

이사 가던 날

by Aphraates 2024. 4. 17.

이사를 몇 번이나 했는지 헤아려봤다.

남들과 비교하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첫 이사는 아주 어렸을 적이다.

청양군 청남면 대흥리(한터) 원적지에서 본적지인 적곡면(장평면) 미당리(벌터)로 이사한 것이었다.

가물가물한데 이사 온 후 얼마 안 있다가 학교에 입학하여 1966년도 2월에 졸업했으니 1960년이나 1959년이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정권을 인수하고, 얼마 안 있다가 5·16 쿠데타가 일어났던 격동기였음을 알 수가 있다.

한터에서 벌터는 거리상으로는 십 리(4km)밖에 안 됐다.

등짐을 지고 이삿짐을 나르는 어른들을 따라가는 길이 얼마나 멀었는지 가도 가도 끝이 없었고, 막상 도착한 새 동네 벌터는 낯설기만 했다.

그 본가는 아직도 장형께서 살고 계신다.

세월 따라 산과 들이 많이 변했듯이 우리 집도 많이 변했다.

초가집이었던 것을 기와집과 양철집으로 개조하였고, 사랑채와 대문과 담과 남새밭이 많이 변하였지만 원 형태는 그대로다.

 

두 번째 이사부터는 떠돌이였다.

중학교(공주), 고등학교(대전), 대학교(서울) 유학을 하면서 하숙, 자취, 무전취식 등을 하면서 몇 번을 이사 다녔는지 모른다.

공주에서는 중동(차부 뒤), 봉황동, 중동(의료원 앞), 중학동으로 이사했다.

대전에서는 선화동, 도마동, 태평동, 유천동, 문화동(서대전역), 산성동, 문화동(보문산) 쪽으로 옮겨 다녔다.

서울에서는 신정동, 상도동, 번동, 세곡동, 홍제동을 전전했다.

군대 3년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남의 뜻대로였다.

논산(훈련소), 파주(봉암리와 어유지리와 감악산), 연천 전곡 한탄강에 이어 중부 전선 임진강 변 종달새 GP에서 만기 제대하였다.

불 공장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사양과 청양의 사택, 대전의 가오동 전셋집과 전민동 사택 아파트를 거쳐 둔산동 자가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생이 이사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많은 이사 가던 날의 세월이었다.

누가 이사 가던 날이든, 어떤 이사이든 그날은 맘이 울적했다.

마주 보며 잘 가라고, 잘 있으라고 인사하는 것이 싫어 숨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처럼 돼 있던 이사에 마냥 그럴 순 없었다.

슬퍼도 안 슬픈 척, 기뻐도 안 기쁜 척하면서 이사를 하고 이사를 보내야만 했다.

 

삼천포살이에 이어 남원살이가 마무리 단계다.

처음 부임하고 이사를 할 때는 다른 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움직여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떠나려고 하니 또 이사 가는 날이 다가온다고 하는 허전함이 앞을 가린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도 들고, 다시는 헤어지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이달 말이면 우리 일원 중에 임기가 유월 말까지인 네 명만 남고 세 분이 철수하신다.

인계인수할 서류와 자료들을 함께 정리하는데 맘이 짠했다.

빅 데이터 개념으로 모든 서류와 자료는 컴퓨터에 데이터베이스화돼 있는데도 무슨 서류가 이다지도 많은 것인지 변압기 한 분야만 해도 삼발이 소형 트럭으로 한 트럭은 되는 것 같았다.

내일은 우리 주관으로 발주처, 시공사, 감리단 연석 송별연이 있다.

감사 인사를 겸한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것이다.

맘이 무겁다.

그럴 나이는 지나 감성도 무디어졌을 만도 한데 또, 산전수전 다 겪은 처지에 약해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달리 생각해보면 그게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냐고 자위해보지만 약하다.

 

https://youtu.be/w1Di4VAyk4o?si=8ND6xLzCeObQk3_K

이사가던날(산이슬).8비트고고컷. G2c (A). 혼자놀기.1인2역 , 다

 

그 보안대원이 생각난다.

필승 부대 종달새 GP에서 전역을 앞두고 준비 중이었다.

하루는 전방 부대를 관장하는 보안대원이 상황병 김 병장 통제하에 철문을 열고 DMZ로 들어왔다.

제대 장병들에 대한 보 암 검색 차원이었다.

계급은 중사라고 하였고, 머리도 직업군인처럼 길렀다.

하지만 병에서 장기 복무를 택하고 하사관 학교에 가려고 대기 중인 병장으로 우리와 같은 또래였다.

무시무시한 보안대인지라 말을 섞지 않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기타를 들더니 밖으로 나가자며 불빛 하나 안 보이고 임진강 물결만이 간간이 비치는 언덕 위로 갔다.

업무적인 다른 얘기는 안 했다.

대신 제대를 축하한다면서 사회에 나가사 잘 살라 이르고는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여자 듀엣이 부른 이사 가던 날이었다.

은은하면서도 격정적이었고,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아쉬움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잠시 함께 한 시간을 뒤로 하고 악수로 작별을 고했다.

나도 말뚝을 박을 게 아니라 함께 제대복을 입고 제대를 해야 했는데......,” 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는데 미당 선생도 같이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그 보안대원도 벌써 전역을 하였을 것이다.

어디에서 어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월이 가고 세상이 변해도 그 그리움과 추억은 남아 않을 것이다.

아무쪼록 건강하고 복스러운 날들이었으면 한다.

지난 것은 아름답다.

고생스러웠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하는 생각과 함께 여유가 있었으면 한다.

 

다 지난 일이다.

48년 전의 아득한 이야기다.(2024-1976=48)

그런 감정이 무디어지지 않고 언제까지 갈지도 모르는 세월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면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제는 옆 방 토건 감리단장님과 토목 감독관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이야기 나눴다.

물 흐르듯이 순리대로 열심히 사는 게 좋다는 데 공감하였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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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yyhm@hanmail.net)

수필가/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원/한국수필가협회원

공학석사/전기안전기술사/PMP, 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국내여행안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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